[조진무 피아골피정집 관장 신부] 삶의 공극(空隙)
2018년 07월 06일(금) 00:00
다른 계곡들이 다 그렇겠지만, 요 며칠 새에 지리산 피아골 계곡에도 물이 많이 불었습니다. 최근 태풍 쁘라삐룬의 영향으로 뿌려진 장맛비 때문입니다. 이 계곡은 이번에 많은 비를 흘러내려 보냈지만 아마도 산 아래 땅 속에도 많은 물을 머금게 할 것입니다. 문득 작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극심했던 가뭄 때가 생각났습니다. 큰 가뭄에도 불구하고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물을 보고 경이롭다고 여겼었습니다. 지리산 위쪽에는 분명 샘물 원천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좀 더 알아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 이유가 바로 공극(空隙) 때문이었습니다. 지표면 밑에 있는 토양의 입자 사이의 틈을 공극이라고 말한다고 하는데, 토양을 구성하는 바윗돌이나 자갈이나 모래와 같은 토양 입자의 크기가 고를수록 입자 사이의 틈이 많아 공극이 커진다고 합니다. 바로 이 공극(틈)에는 흡착된 물(공극수 또는 간극수)이 있고, 계곡에서는 이 물을 계속해서 내려 보내기 때문에 큰 가뭄에도 불구하고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공극은 온갖 식물들의 뿌리에게는 수분을, 온갖 미생물들에게는 다양한 먹을거리와 삶의 자리를 제공해주면서 공극이 담고 있는 물과 공기를 통해 호흡을 가능하게 하여 토양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도록 해줍니다. 그 혜택은 우리 인간에게까지 이르고 있는 셈이지요.

저희 피아골피정집에는 주로 천주교 신자들이 ‘피정’을 하러 자주 찾아옵니다. ‘피세정령’(避世靜靈), ‘피속추정’(避俗追靜)을 줄여서 부르는 피정(避靜)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일정한 기간 동안 고요한 곳에서 머물면서, 묵상과 침묵,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자신들의 영신생활을 새롭게 쇄신하는 일종의 수련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던”(루카 5,16)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고, “너희(제자들)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진 전통이 되었습니다.

피정이란 말마디가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피정에는 두 방향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선, 세상(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거리감을 두는 흐름입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과 사건들 밖으로 나와 잠시 다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때에 비로소 그 이전에 보거나 느끼지 못한 점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나 직장과 사회생활 안에서 얽히고설킨 채 나를 묶고 있는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방법도 뜻밖에 그 ‘문제’들 밖에서 쉽게 찾을 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잠시 벗어나 거리감을 두는 행위는 토양의 공극과 같이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다음으로 피정은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흐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 각자의 존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지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Imago Dei”: 창세 1,26) 믿기 때문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찾고자 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 만남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갖는 삶의 방식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피정의 흐름은 토양의 공극처럼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과 노력을 통해 개인주의와 물질 지상주의에 젖어가는 지금 우리 개개인의 삶과 이 사회에 생명의 가치를 잊지 않게 해줍니다.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수련의 기간이 있겠지만, ‘피정’은 마치 삶의 ‘공극’과 같은 시간이요 때입니다. 모든 생명체에게 토양의 공극이 그 근원이 되어 주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살아가면서 ‘공극’과 같은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가끔은 세상의 일상에서 오는 걱정과 짐에서 벗어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바라보고, 또 개인과 가정 그리고 이 사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찾아가는 길에 선뜻 나서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공극’은 분명히 우리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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