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묵 선덕사 주지]야설(野雪)
2017년 12월 22일(금) 00:00
요즘 세상의 말로 야한 동영상을 야동이라 하고, 야한 소설은 야설이라고 한단다. 흔한 세상의 말이 어떻든 오늘은 야설을 말하고자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별로 춥지 않은 겨울이었는데 올 겨울은 시작부터 추위가 매섭다. 요즘 종종 광주를 떠나 있어서 광주 날씨를 잘 모르지만 중부 지방은 제법 많은 눈이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임연 이양연은 ‘야설(野雪)’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에 /어지러이 함부로 가지 말지니 /오늘 아침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김구 선생이 서산대사의 글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서산대사의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임연 선생의 글이다. 김구 선생은 이 글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하니 야설을 아끼고 늘 마음에 담았던 분이다.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고 바위에 새기고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있다. 글처럼 바르게, 착하게 살아진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저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 정답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 위에서 어지러이 함부로 가지 말아야 한다지만 인생의 눈 덮인 광야에서 길을 찾고 만들어 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어지러이 헤매는 걸음이 아닐 수 있을까.

왕궁에서 출가한 싯다르타는 나무 아래에 앉았다. 출가하기 전에 구상할 때는 출가해서 이러저러하게 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막상 출가해서 수행을 하려고 하니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싯다르타는 명상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기로 결심했다. 당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두 스승으로부터 명상을 배우고 스승의 경지를 직접 체험했지만 싯다르타는 자신이 기대하던 평화와 행복을 얻지 못했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스승들의 말을 뒤로 하고 명상의 길에서 떠난 싯다르타는 고행자들의 숲에 들어가 6년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치열하고 혹독한 고행을 했다. 최고의 고행자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고행을 통해서도 자신이 얻고자 하는 평화와 행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6년간의 고행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함께 고행했던 사람들은 그를 타락한 고행자라고 비난하고 떠나갔다. 싯다르타는 그 비난을 기꺼이 감수했다.

이처럼 수행 과정에서 붓다는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시행착오를 경험했으니 붓다는 어지러이 함부로 길을 걸은 사람일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을 정말 모르는 사람이리라. 누군가가 미리 ‘이것이 올바른 길이야’ 하고 정해놓은 인생길이 있다면, 그렇게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은 노예의 삶이다. 주인공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에게 시행착오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면서 자신의 길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붓다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붓다를 이루어갔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을 통해 시행착오를 통해 흔들리면서 성장하는 삶이 바른 삶이라고 노래한다. 실로 그렇다.

이번 주말은 낮의 길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짓날이다. 다음 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가 있다. 동지와 크리스마스, 설날은 모두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한 해의 끝에서 올해 내가 찍은 발자국을 돌아보자. 발자국이 어지러운지 아닌지는 지금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에 달려있다. 우리의 과거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어제보다 못난 자리로 퇴행하지 않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향상의 길을 찾아가는 걸음은 어떤 발자국이라도 바른 것이며,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이 꽃길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붓다가 몸소 보여주는 삶의 궤적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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