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과잉의 시대
2017년 10월 17일(화) 00:00
우리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다. 사회가 복잡하다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자동차가 너무나 많고 TV 채널이 너무나 많고 백화점의 물건들이 너무나 많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소음과 먼지까지 너무나 많다. 이래저래 우리는 모든 것이 넘쳐 나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넘쳐 나는 것은 물건들뿐만 아니다. 인간의 지적(知的) 활동도 과잉 상태다. 대형 서점에 쌓인 수많은 책을 보면 인간의 지적 활동이 얼마나 왕성(?)한가를 알 수 있다. 이 책들 중에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책들이 많다. 사람들은 왜 ‘그저 그런’ 책들을 이토록 많이 생산해 내는가? 21세기 대한민국에 한정해서 본다면 대학교수들에게 강요된 연구 업적 때문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도록 추동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적 호기심은 식욕이나 성욕처럼 일종의 본능적인 욕구다. 본능적 욕구는 억제하기 어렵다. 인간은 이 본능적 욕구인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책들까지 그렇게 많이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닐까?



억제하기 힘든 지적 호기심



지적 호기심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기술 문명을 무한정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의 노동력을 덜어 주고 생활을 풍요롭게 해 주던 기술이 이제는 ‘너무’ 발달해 버렸다.

과잉의 수준이다. 생명공학은 인간의 수명을 점점 연장해 가고 거리엔 자율 자동차가 굴러다니며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또한 효과적으로 좀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살상 무기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기술의 발달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의 수준에 이르렀다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모두 100세 이상의 수명을 누리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상상해 보라. 이것은 분명 재앙이다.

그러나 기술은 정지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기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인 지적 호기심은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 본능에 이끌려 인간은 쓸데없는 책만큼이나 많은 기술을 빠르게 발명하고 있다. 지식의 과잉이 빚어낸 기술의 과잉이다. 도대체 알파고를 만들어 굳이 이세돌과 대결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식욕이나 색욕과 같은 본능을 무절제하고 과도하게 향유하면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고 있지만, 지적 호기심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른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쯤 해서 우리는 무한궤도를 달리는 기술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학문 활동을 통하여 써내는 글들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단순하게 살고’ ‘느리게 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고전번역원의 하승현(河承賢) 선임연구원이 번역원 사이트의 ‘고전산책’란에 소개한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의 글 ‘분고지’(焚稿識)가 가슴에 와 닿는다(2017년 10월 9일자). ‘분고지’는 문자 그대로 ‘원고를 불태운 기록’인데 그는 글을 왜 써야 하며 모름지기 무엇을 써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가 원고를 불태운 까닭은



나는 예전에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 함부로 글을 쓴 일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욱 부족함을 느꼈다. 이에 두려워지며 정신이 번쩍 들어, 적어 둔 것들을 가져다가 불에 던지고 필묵을 주머니에 담아 다시는 쓰지 않을 뜻을 보이며 “붓아, 먹아, 이 말을 잘 들어라”고 말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생 학문을 한답시고 쓴 글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중에 인간의 삶을 위한 절박한 욕구에서 쓴 글이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내가 쓴 글이 이 시대의 ‘넘쳐 나는 서적’에 보탬이 되지나 않았을까? 자신의 글을 과감하게 불태운 한장석의 용기가 한없이 부럽고 그럴 용기를 갖지 못하고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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