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시간속을 걷다] <15>1927년 갑자옥 모자점
‘모던 뽀이’ 문턱 닳던, 삼척동자도 알던 갑자옥
일제 강점기 목포 본정통에 유일한 조선인 가게
60~70년대 전성기 순천·대전 등 조선 최초의 '체인점'
2017년 09월 28일(목) 00:00
목포시 영해동에 자리한 ‘갑자옥 모자점’은 90년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다. 매장내 중절모 등 다양한 모자를 설명하는 이태훈 대표.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한다. 올해로 꼭 120년 전이다. 부산과 원산, 인천에 이은 네 번째 개항. 앞선 3곳과 달리 고종이 칙령을 내린 자주적인 개항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몰락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목포는 많은 수탈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 명성을 떨친 한 조선인 가게가 있었다. 1920년대 후반, 일본인들의 거리에 문을 연 그 가게는 9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바로 ‘갑자옥(甲子屋) 모자점’ 이야기다.



◇1930년대 대표적 모자점으로 이름떨쳐= 일제강점기에 목포 일본 영사관 앞 일대는 ‘혼마치’, 본정통(本町通)이었다. 영사관을 위시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경찰서, 우체국, 재판소(법원) 등 일제 행정기관과 금융기관, 상업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 가게로는 유일하게 ‘갑자옥 모자점’(이하 갑자옥)이 본정통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영사관 앞 국도 1호선과 목포항 선착장 방향 도로가 마주치는 사거리이다.

현재 그 거리에는 일제시대 위세를 떨쳤던 근대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 일본 상점들이 번성했던 동네는 주로 건어물과 민어를 파는 거리로 바뀌었다. 그래도 갑자옥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사거리 두 면을 접한 3층 콘크리트 건물 정면에는 한자로 ‘갑’(甲)자가, 좌우 면에는 한글로 ‘갑자옥 모자점’이라고 새겨져 있다.

‘옆으로 미세요’라고 쓰여있는 미닫이 출입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자 이태훈(74) 대표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중절모와 헌팅모자(일명 ‘도리구찌’), 운동모, 등산모, 작업모 등 각양각색의 모자들이 벽면 선반에 가지런하게 진열돼 있고, 가게 중앙에는 다양한 가방들이 놓여 있었다. ‘멋쟁이’들이 이런저런 모자를 고르며 한껏 멋을 부릴 수 있도록 삼면 거울을 공중에 매달아 놓아 이채로웠다.

‘모자상계(帽子商界) 권위 갑자옥주 문공언씨’.

동아일보는 1937년 11월 17일자 6면에 ‘대목포 약진 전모’라는 제목을 달고 지역의 젊은 사업가 17명을 얼굴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금융과 주류, 무역, 농업, 인쇄, 염료, 포목상, 정미(精米), 모자, 호모화(護謨靴=고무신) 등 분야가 다양하다. 이 가운데 모자 전문점인 갑자옥(甲子屋) 대표 문씨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씨(氏)는 일즉(일찍) 대판(오사카) 낭화(浪華)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남다른 상계(商界) 관찰력으로 목포 시가 한복판, 가장 번화한 은좌통(銀座通) 사거리에 모자 전문의 상점을 개시한 지도 벌써 10개 성상(星霜)에 …(중략) 남조선 모자상계에서 일왕좌(一王座)를 점령한 위관(偉觀)을 보이고 잇어 삼척동자라도 모자상이라 하면 갑자옥을 인식하리만치 널리 대중에게 인상이 깊다.”

갑자옥은 이 대표의 외가 삼촌뻘인 문공언씨가 처음 문을 열었다. 해방 직후에 문씨의 사촌 여동생이자 이 대표의 어머니인 문금희 여사(1999년 작고)가 이어받았다. 이 대표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 어머니를 도우면서 가게를 맡아 운영하게 됐다.

갑자옥이 문을 연 때는 언제쯤일까? 갑자년인 1924년이 정설로 세간에 굳어져 있다. 하지만 창업자인 문공언 씨가 21살이던 1927년에 일본 오사카 낭화 상업학교를 졸업했고, 동아일보 1937년 기사에 ‘모자 전문의 상점을 개시한 지도 벌써 10개 성상’이라 표현한 것을 토대로 추산하면 1927년이 유력하다. 현재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 대표는 첫 개업 시점에 대해 “1965년 화재로 자료들이 모두 소실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화재 당시 철제 금고만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토지대장에는 소화 10년(1935년)에 문씨가 일본인(松前義三)으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사업 초기에 목 좋은 본정통내 일본인 가게를 임대해 영업을 하다 1935년에 아예 토지를 사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시대 변하며 가게 운영 힘겨워=“(일제 강점기에) 쌀 한 가마를 팔아야 중절모를 샀다고 합니다. 한때 모자는 결혼할 때도 필수품이었어요. 돈을 빌리려고 모자를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답니다.”

외출 때 의관(衣冠) 갖추길 중요시했던 조선인들은 단발령 이후에도 맨머리 대신 서양식 모자를 선호했다. 일본의 경우 17세기 포르투칼 상인들을 통해 서양식 모자가 유입되자 자신들의 전통모자와 구별해 ‘남만 립(南蠻笠)’, 또는 ‘남만 모자(帽子)’라고 불렀다. 남만은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을 의미한다. 1930년대 ‘모던 뽀이(Modern Boy)’ 들은 양장(양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뿔테 안경을 걸치며 한껏 멋을 부렸다고 한다. 가게 앞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은 “멋쟁이들은 여기 모자를 많이 이용했다”고 말했다.

갑자옥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1960∼1970년대에도 전성기를 누렸다. 모자 판매업이 인기를 끌자 이 대표 외가 친척들이 제주와 순천, 대전, 군산 등지에서 같은 상호로 모자점을 운영했다. 그래서 갑자옥은 조선 최초의 ‘체인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창때 여름에는 오전 4시 30분, 겨울에는 6시에 가게 문을 일찍 열었습니다. 상인들이 여기(갑자옥)에서 모자를 떼서 목포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해남, 진도, 신안 오일장으로 팔러 갔습니다.”

본래 갑자옥 건물은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대학 3학년이던 1965년에 화재로 전소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다. 당시 2층은 모자 창고, 3층은 밀짚모자와 학생모를 만드는 공장으로 사용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이 대표 어머니는 모자점을 운영하며 4남매(2남2녀) 교육에 힘썼다. 차남인 이 대표 역시 서울 경복고와 연세대 행정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 대표가 목포로 내려와 모친 가게를 도운 때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무렵이었다.

“60년대가 전성기였죠. 3층에서 밀짚모자와 학생모를 직접 제작했어요. (가게 운영이) 20여 년 전에는 괜찮았고, 10년 전까지만 해도 보통은 됐어요.”

1980년대 까지도 지방 거래가 많았단다. 그러나 IMF를 겪은 이후부터 갑자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원인을 꼽자면 대중들이 예전만큼 모자를 쓰지 않는데다가 시골인구가 줄며 오일장이 쇠퇴했다. 또한 인터넷 상거래가 활성화되고 ‘브랜드’ 제품만을 선호하는 등 전반적으로 한국사회가 크게 바뀐 탓이다. 더욱이 수요가 줄어든데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중국 공장들이 제품가격을 제멋대로 2배씩이나 올려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영화(榮華)를 누리던 시기, 북적거렸던 갑자옥 주변 거리 역시 침체된 상태이다. 갑자옥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 대표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100년 역사를 눈앞에 둔 ‘노포’(老鋪) 주인장은 여전히 매일(일요일 휴무) 오전 7시 30분께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목포=글·사진 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

/목포=고규석기자 yous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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