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찬석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정사목] 치유의 성사
2017년 08월 11일(금) 00:00
2016년 5월 16일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서 한 독일인의 추모식이 있었다. 그는 요즈음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다시 부각된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이다. 2005년 광주를 다시 찾았던 그는 “죽게 된다면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손톱과 머리카락을 남겼고, 그 흔적들을 그를 기리는 표지석 아래 안장했다.

반면,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했던 전임 대통령이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은 법원에서 출판과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 회고록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그 가치를 폄하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가처분 인용 결정을 하면서 회고록의 내용 중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33가지 대목이 모두 허위라고 밝혔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 마저도 부정하려는 시도를 계속 당해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는 없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줄 힌츠페터와 같은 이들이 점점 우리 곁을 떠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꿈꾸며 자신의 삶을 바친 많은 희생자들과 그들을 잃고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을 포함한 광주 시민들의 상처가 제대로 치유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톨릭 교회에도 치유의 성사라고 불리는 고해성사가 있다. 고해성사는 화해의 성사 혹은 용서의 성사이다. 즉 참된 화해와 용서를 통해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적 약점과 죄에 빠지기 쉬운 성향 때문에 하느님과 교회와 늘 새롭게 화해할 자리가 필요하고 그 자리가 바로 고해 성사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고해성사가 세 요소, 곧 참회의 마음과 고백의 말과 보속의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참회(懺悔)이다. 참회는 종교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단 한번의 참회로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다시 죄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참회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이루어져야 한다. 즉 화해를 위해서는 자신의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파하고 뉘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화해의 핵심인 고백(告白)이다. 진정한 참회 없이 고백할 수 없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고백 없이 올바로 속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지은 죄를 숨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고백은 말 그대로 자기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법적으로 말하면 고백하는 사람은 두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죄를 지었으니 피고이고, 스스로 죄를 고발하니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조건은 보속(補贖)이다. 죄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이를 갚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대로 참회한 사람은 당연히 보상과 속죄 곧 보속에 나선다. 참회하고 고백한 뒤 이루어지는 성실한 보속 행위는 단순히 보상이나 속죄를 넘어서는 사랑의 행위이다.

치유의 성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보면, 광주 민주화운동은 아직 첫 번째 단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잘못한 사람들의 진실된 참회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의 고백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용서를 해주고 싶어도 용서 받을 사람이 없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유괴해 죽인 사람을 용서하러 갔지만, 그 살인자는 자신은 이미 용서를 받았노라고 이야기한다. 용서해줄 마음을 어렵게 가져갔지만, 불행히도 그 용서를 받을 사람은 그 곳에 없었던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잊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치유해야 할 현재로 남아있다. 우리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다. 치유를 위해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고백하지 않고 그 잘못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고, 화해할 수도 없고,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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