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한잔- 조경완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장마
2017년 07월 06일(목) 00:00
쏴아 하고 쏟아지는 빗소리란 실은 빗줄기가 수목과 땅과 지붕들을 때리는 소리일 것이다. 구름이 무거워져 지상으로 물방울들을 낙하시키는 동안에 정작 빗소리란 없다. 나는 살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빗소리를 못들을 지도 모르겠다.

장마다. 엊그제 새벽엔 장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을 깼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소월시 왕십리)할 만큼 메마른 대지가 흠뻑 젖어든다. 나같은 올드보이들이라면 누구나 유년시절 여름밤 처마를 두들기며 끝없이 쏟아지던 장맛비의 음향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대개 암연(暗然)한 지루함, 알 수 없는 두려움들로 칠해져 있다.

그 지루함과 두려움의 기억을 유년시절 겪은 한국전쟁의 가족사를 통해 리얼하게 엮어낸 소설이 윤흥길의 중편 ‘장마’다. 6·25가 막바지에 이른 전북 이리. 나(동만)의 집엔 서울 살던 외가가 피난을 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지낸다. 친삼촌은 빨치산, 외삼촌은 육군소위. 어느날 빨치산 소탕작전을 나갔던 외삼촌의 전사통지가 온다. 그때까지 한지붕 밑에 별탈없이 지내던 사돈간은 갈등이 폭발한다. “…엄청나게 장마비가 쏟아지던 날 조용히 콩을 까던 외할머니는 느닷없이 소리쳤다. 더 쏟아져라. 더. 바웃새에 있는 뽈갱이 마자 다 쓸어 가그라!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그려. 옳지. 하느님 고맙습니다. 뛰어 나온 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사정없이 욕을 해댔다. 저 늙다리 여편네가 뒤질라고 환장을 혔댜?…”

소설 전체를 누르고 있는 장맛비의 무거운 긴장 속에 주인공인 나는 평생 잊힐리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초콜릿을 내밀며 빨치산 삼촌의 행적을 묻는 형사에게 삼촌이 다녀간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맥고자를 쓴 한 사내가 세 개째의 초콜릿을 구둣발로 짓뭉개 버렸다. 삼촌이 집에 다녀갔었지? 그게 언제지? 이제는 초콜릿이 두 개밖에 안 남았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전부 말해 버렸다…’ 이 때문에 동만의 아버지는 붙들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난다.

할머니는 동네 소경 점쟁이가 모월 모일 진시(辰時)에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점을 쳐주자 그날만을 기다린다. ‘…점쟁이가 잡아준 날을 세던 할머니는 장마에 묻혀버린 다리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삼촌이 저기를 못 건너면 시오리는 돌아와야 허는디…”

그러나 점쟁이가 예언한 날 빨치산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대신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에 쫒긴 구렁이가 한 마리 마당으로 들어온다. 이를 본 할머니는 까무러쳐 버리고 대신 늘 빨치산을 저주하던 외할머니가 뜻밖의 행동을 한다. 감나무에 올라간 구렁이 아래 음식상을 차리고 두손을 마주 비비며 마치 구렁이가 사돈네 아들의 현신이라도 된 듯 기도하는 것이다. “…에구 이 사람아, 집안 일 못 잊어서 이렇게 먼 질을 찾어왔능가? 노친께서 기력도 여전 허시고 식구덜도 모다 잘있네. 그러니께 어서어서 자네 가야 헐 디로 가소. 노친양반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얼매나 가슴이 미어지겄능가…” 구렁이는 대숲으로 사라지고, 쓰러졌다 깨어난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화해를 한다. 할머니는 그 얼마 후 숨을 거둔다. 지루한 장마가 끝날 무렵이었다.

내력을 좀 뒤져보면 어느 마을에나 있었던 6·25의 이념갈등. 소설 속 두 사돈은 극적으로 화해를 했지만 이웃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살상한 우리 현대사의 깊은 상처는 70년이 다 되도록 남아 있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유년기 장마의 기억처럼 무겁고 눅눅하게 우리를 짓눌러왔다. 촛불과 태극기의 싸움판도, 대통령 선거판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의 색깔시비도 모두 그 연장전이다.

북한 선제타격도 마다않는 미국을 우리 대통령이 겨우 달래고 돌아오자 마자 북한은 ICBM을 쏘아 올리며 이를 헛수고로 만드는 모양새다. 남쪽의 비둘기파들에겐 참으로 고약한 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지난 현충일 기념사에서 “참전 용사도 민주화 희생자도 모두 애국자”라며 우리사회의 성숙한 화해를 도모했지만 장맛비에 우당탕 흐르는 흙탕물처럼 외부긴장이 이를 덮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긴 장마도 끝이 있듯, 구름사이 파란 하늘이 나타나는 여름날처럼 분단으로 인한 긴 갈등도 걷힐 날이 올 것이다. 소설 속 원수같던 사돈간이 화해를 하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에 대한 증오부터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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