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묵 선덕사 주지]붓다로 살자
지난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서기(西紀)는 서력기원의 준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으로 한다. 공기(孔紀)는 공자가 탄생한 기원전 551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그와 달리 불기는 불멸기원(佛滅紀元)으로 부처님이 돌아가신 해를 기원으로 하는데, 기원전 544년을 기원으로 한다. 올해는 불기 2561년인데 석가모니가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므로 부처님의 탄생은 2641년 전이 된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왕비는 아이를 낳을 때가 다가오자 당시 풍습대로 친정인 꼴리 부족으로 가던 중 길 옆 룸비니 언덕에서 잠시 쉬어가게 됐다. 쉬던 중 산통이 시작됐고, 왕비는 향기로운 꽃을 피운 아소카 나무에 기대었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아소카 나무 아래서 태어난 아이는 장차 싯다르타로 불리었다.
아기 왕자는 사방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걸음걸음 발밑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발에 흙이 묻지 않았다. 일곱 걸음을 걸은 아기 왕자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온 세상에 오직 내가 존귀하네. 중생의 세상은 모두 괴로우니 내가 편안하게 하리라”하고 외쳤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리며, 아홉 용들이 따뜻한 물과 시원한 물을 하늘에서 뿌려 왕자를 목욕시켰다.
인간의 아들 싯다르타의 탄생은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탄생에 중요한 상징을 담기 위하여 설화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일곱 걸음은 여섯 갈래 윤회하는 중생의 삶을 뛰어넘는 것을 상징하고, 연꽃이 발을 받침은 어리석음과 번뇌의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함을 성취함을 상징하고, 그 선언은 부처님이 일평생 살아가면서 가르칠 깨달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땅이 흔들림은 세상을 뒤흔들 사건이라는 의미이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꽃비가 내리며,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뿌린 것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건기가 끝나갈 무렵 낮에 내린 반가운 소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우리 각자의 삶도 이런 놀라운 표현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처님은 원래 위대한 분이고 우리는 못난 사람이라는 관념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진실에도 맞지 않는다. 우리의 태어남도 거룩했고, 우리의 살아감도 거룩하다. 다만 거룩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않은 삶을 반복한다고 할까.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쳤고, 그 순간 도둑이 됐다. 그러나 공장을 운영하면서 선행을 할 때 그는 천사였다. 나아가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할 때는 슈퍼맨이었다. 그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계속 변해갔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옆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에게 선물을 할 때는 천사가 되고, 험담하고 비난할 때는 악마가 된다.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은 없으며,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에는 변하지 않는 나와 그가 있다. 자베르 형사가 그랬다. 그는 집요하게도 장 발장을 오직 범죄자라는 고정관념으로 보았다. 그 고정관념의 틀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삶의 의미가 됐다. 그러다가 장 발장이 혁명군의 포로가 된 자신을 구해주자 범죄자 장 발장이라는 고정관념과 구원자 장 발장이라는 현재의 모습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자살을 선택한다. 고정관념이 현실을 자각하면서 깨뜨려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다. 훔치면 그 즉시 도둑이고, 훔치지 않으면 그 즉시 도둑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본래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를 분명히 보고 그 진리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부처노릇 하면 부처라고 부르고, 부처노릇 하지 않으면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관건은 부처노릇이니, 낯설고 어렵더라도 부처노릇 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날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고, 방방곡곡이 모두 부처님이 계시는 도량일테니.
아기 왕자는 사방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걸음걸음 발밑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발에 흙이 묻지 않았다. 일곱 걸음을 걸은 아기 왕자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온 세상에 오직 내가 존귀하네. 중생의 세상은 모두 괴로우니 내가 편안하게 하리라”하고 외쳤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리며, 아홉 용들이 따뜻한 물과 시원한 물을 하늘에서 뿌려 왕자를 목욕시켰다.
땅이 흔들림은 세상을 뒤흔들 사건이라는 의미이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꽃비가 내리며,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뿌린 것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건기가 끝나갈 무렵 낮에 내린 반가운 소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우리 각자의 삶도 이런 놀라운 표현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처님은 원래 위대한 분이고 우리는 못난 사람이라는 관념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진실에도 맞지 않는다. 우리의 태어남도 거룩했고, 우리의 살아감도 거룩하다. 다만 거룩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않은 삶을 반복한다고 할까.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쳤고, 그 순간 도둑이 됐다. 그러나 공장을 운영하면서 선행을 할 때 그는 천사였다. 나아가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할 때는 슈퍼맨이었다. 그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계속 변해갔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옆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에게 선물을 할 때는 천사가 되고, 험담하고 비난할 때는 악마가 된다.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은 없으며,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에는 변하지 않는 나와 그가 있다. 자베르 형사가 그랬다. 그는 집요하게도 장 발장을 오직 범죄자라는 고정관념으로 보았다. 그 고정관념의 틀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삶의 의미가 됐다. 그러다가 장 발장이 혁명군의 포로가 된 자신을 구해주자 범죄자 장 발장이라는 고정관념과 구원자 장 발장이라는 현재의 모습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자살을 선택한다. 고정관념이 현실을 자각하면서 깨뜨려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다. 훔치면 그 즉시 도둑이고, 훔치지 않으면 그 즉시 도둑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본래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를 분명히 보고 그 진리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부처노릇 하면 부처라고 부르고, 부처노릇 하지 않으면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관건은 부처노릇이니, 낯설고 어렵더라도 부처노릇 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날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고, 방방곡곡이 모두 부처님이 계시는 도량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