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서점상下] ‘5월의 공간’ 녹두서점, 비엔날레서 다시 문 연다
2016년 08월 30일(화) 00:00
오는 9월 2일 개막하는 2016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이는 도라 가르시아 작가의 ‘녹두서점-산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을 통해 ‘녹두서점’이 35년만에 다시 문을 연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녹두서점’을 취재하며 놀란 점 중 하나는 서점이 문을 열었던 기간이 생각보다 무척 짧다는 점이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됐으니 겨우 4년 남짓이었다. 광주 사회운동의 거점이자,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곳이라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녹두서점’이 광주 민주화 운동 역사에 남긴 인장은 그만큼 강력하다.

녹두서점은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항쟁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5월 17일 밤,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윤상원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계엄군에게 끌려간 후 아내 정현애(전 광주시 의원)씨는 수많은 사람들 이름이 적힌 ‘외상장부’를 없애고 녹두서점을 이끌어 나간다.

“남편이 잡혀가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게 윤한봉 등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도망가라고 연락하는 일이었어요. 들불야학 책임자였던 윤상원과 2주전 군에서 제대한 시동생(김상집)이 함류했죠. 사람들에게 밥해주고, 치료해 주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민주화대성회 이후에는 이곳 저곳에서 걸려오는 전화 연락을 받아 상황실 역할을 했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서점이 자연스레 지휘부 역할도 하게됐습니다. 계엄군들의 만행을 알리는 전단으로 만들고, 그게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광주에서 조금만 버텨달라’, ‘서울에서 오겠다’며 서울과 안동, 전주에서 연락이 오고는 했습니다.”

녹두서점에 모인 이들은 대자보 문안을 쓰고, 전단을 만들었다. 복사는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진행했다. 학생들에 이어 시민들이 몰려나오면서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자 20일부터는 서점에서 화염병을 만들었다. 집단 발포 후에는 오픈된 공간이었던 녹두서점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광주천변 보성기업으로 옮겨갔다.

“양림동 다리를 건너는데 나주 쪽에서 총기를 든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는 거예요.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죠. 무섭기는 했지만, 어찌보면 난 그냥 ‘빵잽이 부인’이었지만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한 일이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여동생과 다시 녹두서점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죠.”

녹두서점으로 돌아온 건 21일 오후였다.

“당시 우리는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가장 먼저였어요.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사명보다, 죽어 버린 이들에 대한 마음을 많이 갖고 있엇죠. 당시 시집올 때 가져온 보르네오 장롱에 검은 천이 들어있었어요. 도청에 조기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천을 잘라 검은 리본을 만들었어요. 이 리본을 달고 도청으로 모여달라고 말했죠. 한편으로는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도 준비했구요.”

유신반대 운동도 펼치다 구속된 이들의 부인 모임인 ‘송백회’는 5월 항쟁 중 큰 역할을 한다. 서점에서 도보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상무관에는 수많은 시체가 놓여 있었다.

“상무관에 시체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수의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광목천을 샀죠. 시체에 묻은 피라도 닦아내라며 광목천 중 일부는 상무대로 보내고 서점 앞 광주 국세청에서 나머지로 플래카드를 만들었어요. 궐기 문안도 작성하고, 성명서, 호소문 등 다양한 문건들도 작성했습니다. 24일에는 전두환 처형식도 열었구요.”

이후 녹두서점 팀들은 광주 YWCA건물(현 전일빌딩 뒤 D갤러리)로 옮겨 활동하게 된다.

“당시 들불야학 학생들이 투사회보 만드는 데 심부름을 하곤 했죠. 리본 만들고 밥하는 여성 시민들도 많이 있었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이들도 있었죠. 27일 새벽 2시 쯤 YWCA에서 나와 서점까지 걸어가는데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어요. 5분이면 갈 거리를 거의 1시간이 걸렸습니다.”

집에는 누군가가 놓고 간 총이 보였다.

“금방 잡혀갈 것같은 예감이 들었죠. 총이 집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는 밖에서 발견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점 가까운 전신주 아래 총을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데 권총을 든 사람들이 들이닥쳤죠.”

정씨는 시동생, 여동생과 함께 붙잡혔고 녹두서점은 시아버지가 명맥을 이어간다. 그해 9월 풀려나 다시 서점으로 돌아간 그녀는 서점 문을 계속 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구속자 가족들, 5·18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쉽사리 문을 닫을 수 없었다.

이후는 석방 운동에 매진했다. 조작된 재판을 무너뜨리기 위해 증거와 증인을 모아야했다. 서명작업이 이어졌고, 성당과 교회를 중심으로 운동이 펼쳐졌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에 왔다. 정씨는 차 앞으로 뛰어들어 두 마디를 외쳤다. “사형수 살려주세요, 석방시켜 주세요.” 그해 3월말 특별사면이 결정됐다.

1981년 5월 문을 닫은 녹두서점은 2016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다시 문을 열게 됐다. 스페인의 도라 가르시아 작가는 ‘녹두서점-산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을 통해 녹두서점을 재현했다.

29일 현장을 찾은 김상윤·정현애 부부는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태극기가 덮인 관, 서점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붉은 전봉준 액자, 책꽃이에는 약 4000권이 책이 꽂혔다.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 등 당시 서점에서 읽었던 책들은 물론이고, ‘요즘의 책’들도 함께 꽂혔다. 또 5·18 기록관에서 가져온 책과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유품 등도 전시된다.

“지식의 그릇이자,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 책을 통해 지식을 전달할 뿐 아니라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그 곳에 모이는 사람들을 통해 지식을 공유했던 ‘지식과 공동체의 장소”를 복원해 내고 싶었던” 도라 작가는 부부에게 편지를 보냈고 작업이 진행됐다.

평소 국가 폭력과 저항에 관심이 많았던 도라 작가의 이번 작품은 망월동 구묘역 참배에서 시작됐다.

“구묘역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무덤에 놓여 있던 과일, 담배, 노트 등이었어요. 누군가가 죽어 있는 무덤에 살아 있는 것들이 함께하는 게 의미있다고 봤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알게됐고, 윤상원을 알게됐고, 들불야학에 이어 녹두서점을 알게됐어요. 파리 코뮨처럼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고 이후 5·18 기간 동안 다양한 역할을 했단느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녹두서점은 책만 판 게 아니고 토론하고, 산 자와 죽은자가 함께 했던 공간이었죠. 전통적으로 서점이라는 공간이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도 녹두서점을 소재로 삼게 된 이유입니다.”(도라)

“도청이 진압된 27일 새벽 잠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모두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우리가 꿈꿨던 거, 우리가 이루려고 했던 거, 갈망했던 거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우리들 목숨을 포함해서요. 오랫동안 잊혀졌던 기억들이 여러 사람들에게로 확장되는 모습을 본 것같아 경이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에게 참 고맙습니다.”(정현애)

“과거의 기억과 흔적을 퍼올려주는 샘같은 공간인것같습니다. 녹두샘에 오셔서 새로운 것들을 퍼가시길 바랍니다.”(김상윤)

세상에 다시 나온 ‘녹두서점’을 통해 우리는 5월 광주를 기억하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꿈꾸게 된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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