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섭과 우제길, 그들의 아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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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것은 즐겁다. 공짜로 받으면 더 기쁘다.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말은 적어도 받는 그 순간에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고들 하지만 아니다.
얼마 전 광주시립미술관에 갔다가 책을 세 권이나 공짜로 얻었다. 그 중 하나가 사랑하는 아내를 젊은 나이에 먼저 보내야 했던 화가 렘브란트의 ‘도록’(圖錄)이다. 서가에 꽂아 놓고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미술관을 찾았던 날이 마침 ‘문화가 있는 날’(매달 마지막 수요일)이어서 뜻하지 않게 횡재를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매년 지역 미술계와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끼친 원로 또는 작고 작가를 선정해 초대전을 개최한다. 올해는 1960년대 전후 광주·전남 지역에 추상미술의 도입으로 한국현대미술 운동에 기여한 고(故) 최종섭(1938∼1992) 화백 회고전이 열렸다.
최종섭은 광주 출생으로 1957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강용운·양수아 화백에 이은 광주·전남 지역의 추상미술 제2세대 작가다. 그는 이 지역 추상미술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30여 년간 ‘에뽀끄’(epoque:新紀元) 그룹을 이끌기도 했다.
1964년에 창립된 광주의 ‘에뽀끄’는 1954년 서울의 ‘오리진’, 1963년 부산의 ‘혁’(爀)에 이어 생긴 한국에서의 세 번째 비구상 그룹이다. 생각해 보니 ‘에뽀끄’란 생소한 명칭과 최종섭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 문화부 기자 시절이던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세월이 많이 흐르고, 1992년 병상(病牀) 유작을 마지막으로 생을 다한 그의 회고전을 찾은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라는 작품 앞에서는 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전시회를 다녀간 문순태(소설가) 선배가 그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경건하게 서 있었다고 토로한 것처럼 나 또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이 작은 정성을 바치노라-나는 지금까지 그녀를 사랑했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리라. 나와 정인숙의 만남은 68년 11월 늦가을의 에뽀끄 전시장에서다. 처음부터 그는 내 아내가 됐음을 알았다. 그 후 71년 2월20일 오후 3시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한 출발이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사랑했고 또 사랑했다. 이제 3형제의 아들들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1992년 3월6일 남편 최종섭.”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하는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해 그는 췌장암으로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터였다. 그는 마지막 생명이 연소될 때까지 오로지 아내를 위해 그림 100점을 그리기로 약속했다. 병상에서 하루 24시간 진통제를 맞아 가며 작품에 매달렸다. 혼신의 작업이었다. 하지만 끝내 100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연작 50여 점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그러니 23년 만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서 어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으랴.
먹먹해진 가슴으로 전시장을 돌아 나오면서 나는 최종섭과 함께 이 지역 추상미술을 이끌어 온 또 한 명의 화가를 떠올렸다. 70년대 에뽀끄를 통해 그와 함께 활동했던 ‘빛의 화가’ 우제길(73). 그를 떠올린 것은 그의 ‘아내 사랑’ 또한 참 유별나다 싶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제길이 띠동갑인 부인 김차순(61)을 만난 것은 22년 전, 그의 나이 51세, 부인의 나이 39세였을 때다. 서로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부인은 충청도의 한 농장에서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젖소가 100마리까지 불어났을 때 우제길을 만났다. 부인에게 우 화백은 101번째 소였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우 화백의 호(號)가 ‘우보’(牛步) 아닌가.
이후 부인의 모든 재산은 아낌없이 우제길에게 투자된다. 최종섭이 세상을 떠났던 92년, 그해 31년간의 교단 생활을 정리한 우 화백은 전업작가가 돼 온갖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그 어려움을 함께 한 이가 바로 부인이었다.
우 화백이 공처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지고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미술과 패션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패션쇼를 개최했을 당시, 부인이 겪었던 고생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천들이 내려오면, 수십 벌의 옷들에 작품 이미지가 그려지고 부인은 밤새워 그 수십 벌의 천과 옷들을 다리미질해 새벽 첫 고속버스 편으로 발송하고.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고생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예술적 삶의 덩어리’들을 통째로 옮기는 네 번의 이사 끝에 광주 운림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시공을 맡았던 라인건설의 부도. 그러나 부인은 암 수술을 마친 후 쉴 틈도 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를 직접 진두지휘하며 끝내 완공을 해내고. 발이 닳도록 관계부처를 찾아 예산을 따오는 것도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드디어 1998년 두 곳에 맡겨둔 작품들과 살림들을 옮겨오는 다섯 번째 커다란 이사. 이어서 2003년 의재로 큰 도로변에 소공원 조성. 건축가 승효상을 수십 번 찾은 끝에 ‘빛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린 조각 작품 같은 건축물인 ‘우제길 미술관’을 지난해 완공하기까지. 이 모든 것이 부인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게다가 부인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20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16년간 극진히 모셨단다. 시어머니를 봉양하던 때 부인은 자궁암과 유방암 그리고 무릎 관절 수술 등 큰 수술만 열한 번이나 했다니 그 힘든 세월들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 화백은 회고한다. “김차순은 작가인 나의 삶과 작업에 대한 뒷바라지를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없이 멀고도 먼 길을 말없이 걷고 또 걸어 왔다. 남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고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나와 함께했다. 예술보다 더 강한 게 무엇일까? 나는 아내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충분히 감동을 했다. 그러기에 난 늘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얼마 전 광주시립미술관에 갔다가 책을 세 권이나 공짜로 얻었다. 그 중 하나가 사랑하는 아내를 젊은 나이에 먼저 보내야 했던 화가 렘브란트의 ‘도록’(圖錄)이다. 서가에 꽂아 놓고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미술관을 찾았던 날이 마침 ‘문화가 있는 날’(매달 마지막 수요일)이어서 뜻하지 않게 횡재를 했다.
최종섭은 광주 출생으로 1957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강용운·양수아 화백에 이은 광주·전남 지역의 추상미술 제2세대 작가다. 그는 이 지역 추상미술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30여 년간 ‘에뽀끄’(epoque:新紀元) 그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세월이 많이 흐르고, 1992년 병상(病牀) 유작을 마지막으로 생을 다한 그의 회고전을 찾은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라는 작품 앞에서는 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전시회를 다녀간 문순태(소설가) 선배가 그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경건하게 서 있었다고 토로한 것처럼 나 또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이 작은 정성을 바치노라-나는 지금까지 그녀를 사랑했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리라. 나와 정인숙의 만남은 68년 11월 늦가을의 에뽀끄 전시장에서다. 처음부터 그는 내 아내가 됐음을 알았다. 그 후 71년 2월20일 오후 3시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한 출발이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사랑했고 또 사랑했다. 이제 3형제의 아들들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1992년 3월6일 남편 최종섭.”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하는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해 그는 췌장암으로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터였다. 그는 마지막 생명이 연소될 때까지 오로지 아내를 위해 그림 100점을 그리기로 약속했다. 병상에서 하루 24시간 진통제를 맞아 가며 작품에 매달렸다. 혼신의 작업이었다. 하지만 끝내 100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연작 50여 점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그러니 23년 만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서 어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으랴.
먹먹해진 가슴으로 전시장을 돌아 나오면서 나는 최종섭과 함께 이 지역 추상미술을 이끌어 온 또 한 명의 화가를 떠올렸다. 70년대 에뽀끄를 통해 그와 함께 활동했던 ‘빛의 화가’ 우제길(73). 그를 떠올린 것은 그의 ‘아내 사랑’ 또한 참 유별나다 싶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제길이 띠동갑인 부인 김차순(61)을 만난 것은 22년 전, 그의 나이 51세, 부인의 나이 39세였을 때다. 서로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부인은 충청도의 한 농장에서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젖소가 100마리까지 불어났을 때 우제길을 만났다. 부인에게 우 화백은 101번째 소였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우 화백의 호(號)가 ‘우보’(牛步) 아닌가.
이후 부인의 모든 재산은 아낌없이 우제길에게 투자된다. 최종섭이 세상을 떠났던 92년, 그해 31년간의 교단 생활을 정리한 우 화백은 전업작가가 돼 온갖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그 어려움을 함께 한 이가 바로 부인이었다.
우 화백이 공처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지고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미술과 패션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패션쇼를 개최했을 당시, 부인이 겪었던 고생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천들이 내려오면, 수십 벌의 옷들에 작품 이미지가 그려지고 부인은 밤새워 그 수십 벌의 천과 옷들을 다리미질해 새벽 첫 고속버스 편으로 발송하고.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고생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예술적 삶의 덩어리’들을 통째로 옮기는 네 번의 이사 끝에 광주 운림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시공을 맡았던 라인건설의 부도. 그러나 부인은 암 수술을 마친 후 쉴 틈도 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를 직접 진두지휘하며 끝내 완공을 해내고. 발이 닳도록 관계부처를 찾아 예산을 따오는 것도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드디어 1998년 두 곳에 맡겨둔 작품들과 살림들을 옮겨오는 다섯 번째 커다란 이사. 이어서 2003년 의재로 큰 도로변에 소공원 조성. 건축가 승효상을 수십 번 찾은 끝에 ‘빛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린 조각 작품 같은 건축물인 ‘우제길 미술관’을 지난해 완공하기까지. 이 모든 것이 부인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게다가 부인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20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16년간 극진히 모셨단다. 시어머니를 봉양하던 때 부인은 자궁암과 유방암 그리고 무릎 관절 수술 등 큰 수술만 열한 번이나 했다니 그 힘든 세월들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 화백은 회고한다. “김차순은 작가인 나의 삶과 작업에 대한 뒷바라지를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없이 멀고도 먼 길을 말없이 걷고 또 걸어 왔다. 남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고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나와 함께했다. 예술보다 더 강한 게 무엇일까? 나는 아내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충분히 감동을 했다. 그러기에 난 늘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