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들의 아름다운 도전
2010년 01월 25일(월) 00:00
지난 19일 오후 광주일보 문화부에 한 중년여인이 찾아왔다. 올해 본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정보고씨(48)였다. 이날 오후 4시에 열리는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서 온 그녀에게 축하인사를 건네자 18살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지난해 연말 당선통지 전화를 받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는 정씨는 당선소감에서 ‘8년 전의 일’을 들려줬다.

지난 2002년 여름 그녀는 문학공부를 하는 지인들과 함께 대전 시립미술관 앞마당에서 열린 공연을 보러 갔다. 그리스 신화의 ‘미궁’을 소재로 한 연극이었는 데 공연 도중 한국축구가 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연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작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 한국축구가 8강에 진출한 것은 신화입니다.”

정씨는 “이번 신춘문예 당선으로 ‘그 신화’를 체험하고 있다”면서 “뒤늦게 문단에 나와 언제 책이 나올까?”라는 주위의 우려를 씻도록 창작에 매진하겠다고 의욕을 내비쳤다. 그녀에게 있어 이번 신춘문예 당선은 각별하다. 학창시절 문학소녀였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후 대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결혼과 육아로 바쁜 일상에서도 대전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리고 큰 애가 대학에 들어간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쓰기에 매달렸다. “문학은 삶의 미궁을 빠져나오게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다”는 정씨는 30여년 간 ‘실을 놓치지 않은’ 열정 덕분에 마침내 소설가의 꿈을 이뤘다.

늦은 나이에 ‘꿈’을 이룬 또 한명의 주부가 있다. 최근 광주일보에 보도된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사 황유정(48)씨가 주인공이다. 10년 전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세월 가는 줄 모르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품게 됐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황유정’이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 2002년, 우연히 광주시립미술관의 미술강좌를 듣고 ‘예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후 공부에 욕심이 생긴 그녀는 지난 2004년 조선대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학예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스토리’가 화제가 되는 것은 오랫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자신들의 꿈을 이뤘다는 점이다. 특히 뭔가 시작하기엔 ‘어중간한’ 불혹의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는 사실은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40∼50대들에게 희망을 준다. 이들에게 있어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었다. 혹여 나이 때문에 ‘도전’을 망설이고 있다면 시인 정희성의 ‘태백산행’를 권한다.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쉰 일곱이라고/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좋을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좋을 때다 좋을 때다/말을 받는다.(이하 생략)”



/문화생활부장·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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