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학동에 첫 둥지…송정리 시대 거쳐 77년 만에 ‘이별’ 준비
광주 군공항의 역사
광주의 역사와 함께해 온 군공항은 한때 ‘국가 안보의 보루’였으나, 도시가 팽창하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등 굴곡진 세월을 겪어왔다.
17일 광주시에 따르면 광주 공항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인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주시 동구 학동에 처음 둥지를 튼 광주비행장은 1949년 민간 항공기가 취항하면서 전남 지역의 하늘길을 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됐고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64년 1월, 지금의 위치인 광산구 신촌동(당시 광산군 송정읍)으로 자리를 옮기며 ‘송정리 시대’를 열었다.
군사 공항으로서의 위상은 1966년 더욱 공고해졌다. 공군 제1전투비행단(1전비)이 이곳으로 창설·이전해 오면서다. 이때부터 광주 군공항은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를 운용하는 등 정예 조종사를 양성하고 서남부 영공을 수호하는 핵심 기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만 해도 송정리 일대는 허허벌판 외곽 지역이었기에 소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군부대 주둔은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상무대(육군 보병학교 등)가 장성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규모 택지개발지구인 ‘상무지구’가 들어서면서 갈등의 불씨가 댕겨졌다.
광주의 도심이 서쪽으로 급격히 팽창하자, 외곽에 있던 군공항이 사실상 도심 한복판에 갇히는 형국이 됐다.
2000년대 들어 광주가 광역도시로서 면모를 갖춰갈수록 전투기 굉음은 시민들의 일상을 파고드는 고통이 됐다.
학교 수업이 중단되고 전화 통화가 어려울 정도의 소음 피해가 잇따르자, 인근 주민들은 ‘소음 피해 보상 소송’을 제기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
국가 안보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광주시가 매년 국방부와 소음 피해 배상금을 놓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소모적인 상황도 반복됐다.
해결의 실마리는 정치권에서 시작됐다. 2013년 ‘군 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기부 대 양여 방식의 이전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힘입어 광주시는 2014년 10월, 국방부에 처음으로 이전 건의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6년 국방부로부터 이전 타당성 ‘적정’ 통보를 받았음에도, 예비이전후보지 선정 단계에서 인근 지자체의 반발과 정치적 셈법이 맞물리며 사업은 10년 넘게 표류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지난 10년은 광주 시민들에게 ‘희망 고문’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2025년 12월 17일, 광주시와 전남도, 무안군 등 관계 당국이 마주 앉는 6자 회담에서 77년을 이어온 ‘굉음의 역사’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17일 광주시에 따르면 광주 공항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인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주시 동구 학동에 처음 둥지를 튼 광주비행장은 1949년 민간 항공기가 취항하면서 전남 지역의 하늘길을 열었다.
군사 공항으로서의 위상은 1966년 더욱 공고해졌다. 공군 제1전투비행단(1전비)이 이곳으로 창설·이전해 오면서다. 이때부터 광주 군공항은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를 운용하는 등 정예 조종사를 양성하고 서남부 영공을 수호하는 핵심 기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만 해도 송정리 일대는 허허벌판 외곽 지역이었기에 소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군부대 주둔은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광주의 도심이 서쪽으로 급격히 팽창하자, 외곽에 있던 군공항이 사실상 도심 한복판에 갇히는 형국이 됐다.
2000년대 들어 광주가 광역도시로서 면모를 갖춰갈수록 전투기 굉음은 시민들의 일상을 파고드는 고통이 됐다.
학교 수업이 중단되고 전화 통화가 어려울 정도의 소음 피해가 잇따르자, 인근 주민들은 ‘소음 피해 보상 소송’을 제기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
국가 안보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광주시가 매년 국방부와 소음 피해 배상금을 놓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소모적인 상황도 반복됐다.
해결의 실마리는 정치권에서 시작됐다. 2013년 ‘군 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기부 대 양여 방식의 이전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힘입어 광주시는 2014년 10월, 국방부에 처음으로 이전 건의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6년 국방부로부터 이전 타당성 ‘적정’ 통보를 받았음에도, 예비이전후보지 선정 단계에서 인근 지자체의 반발과 정치적 셈법이 맞물리며 사업은 10년 넘게 표류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지난 10년은 광주 시민들에게 ‘희망 고문’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2025년 12월 17일, 광주시와 전남도, 무안군 등 관계 당국이 마주 앉는 6자 회담에서 77년을 이어온 ‘굉음의 역사’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