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광주학생독립운동史 영화로…세계 속 동포들과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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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광주학생독립운동史 영화로…세계 속 동포들과 교감
<9> ‘이름없는 별들’과 영화 제작자 이재명
1929년부터 7개월 간 대규모 항일운동
1959년 운동 30주년 기념해 영화 제작
학생 4만명 무료 출연 등 광주시민 전폭 참여
‘반일’경험 동원한 ‘반공’으로 질서 강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영구 집권 의도 내포
2024년 10월 30일(수) 08:00
오는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약칭 운동)’ 기념일이다. 1929년 11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진 ‘운동’은 광주에서 시작하여 호남을 거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이어진 항일 민족주의 운동이다. 또한,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흥미롭게도 ‘운동’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1959년 해당 운동을 극적으로 재현한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이 개봉하였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김강윤의 감독 데뷔작이자 이재명이 대표를 맡은 아세아영화사의 영화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독립지사의 아들 상훈은 뜻맞는 교우와 더불어 학생 비밀결사체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하고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한문 선생의 지도를 따른다. 어느 날 이들 단체에 고등계 형사를 오빠로 둔 영애가 가담한다. 항일운동이라는 거사를 앞둔 날 밤 이들 단체는 발각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영애는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영애는 죽음을 무릅쓰고 동지들을 피신시키고 다음 날 아침 광주의 학생들이 모두 봉기에 참여하고 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간다.

‘이름 없는 별들’은 극적 세계에 성진회를 직접 제시하고 ‘운동’의 발생과 전개를 연대기적으로 배치하여 역사적 경험을 환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계몽 영화가 자칫 유발할 수 있는 진부성을 상쇄하기 위하여 노래 또는 야구와 같은 스포츠 장면을(비록 민족적 감정을 유발하는 장치들이긴 하지만) 포함하여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였다. 출연진 역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배우들로 구성되었다. 독립지사의 아들 상훈 역에 황해남, 상훈의 어머니 윤씨 역에 전옥(全玉), 한문 선생 송운인 역에 최남현, 영애 역에 조미령 그리고 최영식 역에 장민호 등이 출연하였다. 연출에도 신경을 써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와 서울합창단의 합창으로 영화 사운드를 구성하였다.

‘이름없는 별들’ 신문광고.
역사적 사실의 극적인 재현인 만큼 ‘이름 없는 별들’의 제작은 광주시민의 전폭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로케이션 촬영은 당연히 서중학교(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이뤄졌다. 시위 군중 장면을 위해 4만 명의 학생이 대가 없이 참여했으며 이들을 위해 광주 시내 모든 제과점이 빵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영화 개봉에 대한 관객의 관심 역시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 개봉은 중구 을지로 4가의 국도극장에서 이뤄졌다. 객석을 1457석이나 갖춘 대형 극장이었다. 광주 개봉은 ‘운동’을 기념하여 11월 3일 광주극장과 동방극장(무등시네마의 전신)에서 동시에 이뤄졌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광주시민뿐만 아니라 담양과 장성 등 인근 전남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영화 제작자 이재명
‘이름 없는 별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였고, 광주에서 개봉한 다음 날 조선일보는 ‘민족정신을 아로새긴 가작’이라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해당 영화가 ‘극영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고 ‘문교부 추천 영화’로 선정되면서 학생들의 단체 관람까지 끌어냈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반일’의 경험을 동원해서 ‘반공’에 바탕을 둔 질서를 강화하고 나아가 권력자의 영구 집권을 획책하는 의도가 다분한 영화였다. 즉, 영화의 극적 전개의 정점에 배치된 태극기는 상해에서 독립지사로 활동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아들의 충효 정신을 상징하였다.

또한, 비련의 인물을 대표하며 ‘눈물의 여왕’으로 불린 악극(樂劇) 스타 전옥은 강건한 이미지의 독립지사 아내로 변신하였다. 게다가 고등계 형사 오빠 때문에 성진회의 의심을 받은 여학생을 연기한 조미령은 ‘춘향전’(이규환, 1955)에서 펼친 성춘향의 정절을 재연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제에 의연히 맞선 존재라기보다 대의를 명분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이 영화가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작된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름 없는 별들’은 함평 출신 영화 제작자 이재명과 연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광주 출신 최남주(崔南周)가 조선 최초로 영화 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지배인이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이재명은 제작 현장에 남아 일했다. 해방 이후 그는 한국 영화산업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영화업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인지 ‘이름 없는 별들’은 제작 단계부터 정부의 관심을 받았다. 역사적인 주요 장면은 광주 현지에서 주로 촬영했지만, 무대 세트 촬영은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로 알려진 안양영화촬영소에서 이뤄졌다. 기획 및 제작자 홍찬(洪燦)이 운영한 수도영화사가 1957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재 안양시)에 설립한 영화촬영소였다.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재”들을 갖춘 안양영화촬영소에서의 촬영은 영화제작가협회장 이재명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국가 건설에 있어서 영화의 위상을 나타냈다. 안양영화촬영소 상량식에 이승만이 참석할 정도로 영화는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름 없는 별들’은 조선성을 보여주는 영화로 세계 진출을 꿈꿨던 최남주의 후예로서 이재명이 손색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영화였다. 이는 해방 이후부터 해당 영화 제작 이후까지 이재명의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재명은 적산인 (사)조선영화사를 인계받아 이사장이 되었고 조선영화건설본부 조선영화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 ‘이름없는 별들’은 광주 학생 4만명이 무료로 출연하는 등 광주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제작됐다. 사진은 제89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식 모습. <위경혜 제공>
1947년 이재명은 국내 최초의 예술 사절로서 안철영과 함께 하와이를 거쳐 할리우드를 시찰할 기회를 얻었다. 안철영은 미군정청 문교부 예술과장이자 영화감독이었다. 이재명은 안철영과 함께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을 기획하고 제작하였다. 해당 영화는 ‘세계의 낙원‘으로 소개된 하와이에서 살아가는 조선인 이민자의 생활을 기록한 16mm 다큐멘터리였다. 상영 시간은 34분에 지나지 않지만,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하와이에 정착한 조선인 교포의 삶을 소개하였다. 영화의 각 장면은 냉전기 지리적 차이를 초월하여 연결된 혈연과 문화적 공동체 나아가 정치적 공동체로서 독립을 염원한 조선인을 전시하고 ‘조선성’을 구축하는 데 일조하였다.

1956년 1월 이재명은 아세아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7월 대한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까지 맡았다. 1961년 그는 문화공보부 영화분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62년 8월 미국공보원 후원으로 대한문화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동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 영화업계를 시찰하고 귀국한 이재명은 1963년 11월 사단법인 한국문화영화업자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그야말로 영화 관련 주요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1962년 미국 영화업계를 시찰할 당시 ‘이름 없는 별들’은 미국에서 16mm 필름으로 상영한 것이다. 이재명은 재미 교포들이 영화를 관람한 이후 ‘눈물을 닦으며 와락 달려들어 끌어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영화예술의 참다운 호흡을 깨달은 듯’하다고 술회하였다. 이는 최남주가 ‘조선적인’ 영화를 만들어 세계 속의 조선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던 포부를 대변하였다. 즉,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창립하면서 “조선사람이 많이 가 사는 곳이면... 하와이, 만주, 일본 내지를” 목표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던 최남주의 꿈을 이재명이 실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한 상상된 공동체의 확인과 세계성의 획득 목표가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 욕망에서 출발한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조선성 또는 2024년 현재 K-컬쳐로 대표되는 한국성의 영화화와 세계 진출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경혜 -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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