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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만추 리마스터링’
<1>도망친 곳에서 맞닥뜨린 잠깐의 낙원이 주는 여운
2023년 12월 11일(월) 08:00
‘만추’ 스틸컷
극장가를 달군 뜨거운 인기작부터, 비교적 조명받지 못했지만 고유의 예술 가치를 담고 있는 예술영화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는 몸과 마음의 열기를 식히고 문화적 감수성을 재충전하는 좋은 방편이 된다.

‘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에서는 멀티플렉스, OTT 플랫폼을 비롯해 광주극장, 광주독립영화관 등에서 상영하는 화제의 영화들을 소개한다.

화질과 음향을 보정해 스크린에 올랐던 영화를 다시 선보이는 ‘리마스터링’ 열풍이 뜨겁다. 지난해 11월 개봉 이래 누적 관객 수 110만 명을 돌파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리마스터링을 거쳐 지난 15일 재개봉했으며, 영화 ‘겨울왕국’도 10주년을 맞아 30일 극장가를 다시 찾았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현빈, 탕웨이 주연의 2011년 개봉작 ‘만추’. 지난 달 8일 재개봉해 전국 극장가와 OTT에서 상영 중이다. 소슬한 가을을 저만치 보내버린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삭풍이 바싹 다다른 계절, 다시 한 번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인번호 2537번의 애나(탕웨이 분)는 살인 전과로 7년째 수감생활 중이다. 어머니의 부고로 3일간 특별 휴가가 주어지고 장례식에 가기 위해 시애틀행 버스를 탄다. 그녀는 고작 72시간 내로 교도소로 돌아와야만 한다. 갈색 코트를 입고 철문 밖에 선 그녀는 가을 낙엽처럼 세상에 한 철 나뒹군 셈. 철문 앞에서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달리던 시애틀행 버스가 중간 정거장에서 손님들을 태운다. 막 출발하려는 순간 애나 앞으로 처음 만난 남자 훈(현빈 분)이 급하게 달려와 ‘30불’만 빌릴 수 있냐고 묻는다. 그녀는 전후 사정도 묻지 않고 돈을 빌려준다.

접어뒀던 가을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능글맞은 카사노바 ‘훈’은 답례로 시계를 손목에 채워준다. 애정소설에서 고전적으로 사랑의 ‘징표’처럼 둘을 이어주는 매개물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일 없이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훈은 돈으로 여자들을 만나며 그저 공허한 시간을 보내고, 본가에 도착한 애나도 반기는 이 없는 밋밋한 시간을 보낸다. 애나는 기분전환을 위해 7년 만에 막혀버린 귓불을 뚫고 한껏 몸치장한 채 길거리에 나선다. 그녀의 행적을 확인하는 교도소 전화가 울리자 현실은 ‘악몽’이 된다.

잠깐 입었던 예쁜 옷을 화장실에 버리고 그녀는 교도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일찍이 미셸 푸코는 완벽한 ‘유토피아’에 비견되는 개념으로,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공간, 일시적인 유토피아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했다. 이불과 의자로 만든 임시 아지트, 다락방, 나만의 도서관 등이 바로 그것.

어린 시절 조악하게 만들었던 인디언 텐트에도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야 재밌는 법인 것 같다. 교도소로 돌아가던 애나는 우연히 또다시 훈과 만나 시애틀의 폐 놀이공원으로 함께 향한다. 이들은 서로의 아픔과 삶의 노정을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 같은 일시적인 헤테로토피아 속에서 둘은 서로에게 운명처럼 끌리지만, 두 사람은 온전히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도 마찬가지...훈이 “지금 몇시죠”라고 묻자 애나가 뜬금 없이 “나랑 잘래요?”라고 답하며 모텔로 향하던 모습도 여운으로 남는다.

그러면서도 이런 장면들은 영화가 으레 삽입하는 베드신을 위한 장치라기보다 서로 상처를 위무하는 ‘필수적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육체적인 결합 없이 헤어지고, 둘의 세계에 안온한 ‘낙원’ 따위는 없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시애틀 투어는 계속된다. 염려되었던 점은 애나에게 남은 시간이 ‘3일’로 한정되어 있기에,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몰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 같은 고민이 기우였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드러나게 된다. 지나가던 낯선 연인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훈은 그들의 입모양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마음대로 내레이션을 입힌다.

“난 항상 그런 눈으로 당신을 봐왔어요/ 난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어쩌면 훈의 목소리일지도 모르는 이 유치한 각본에, 애나는 진심을 담아 나레이션을 따라한다.

그들이 목소리를 입혔던 외국인 연인들은 얼마 후에 자리를 떠나버린다. 상황극은 돌연 마무리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환기된다.

폐상가에서, 을씨년스러운 지하철 플랫폼 아래에서 나누는 대화는 짤막하고 투박하지만 깊이가 있다.

중국 출신 애나와 한국인 훈의 대화는 새로운 ‘위로의 방식’을 보여주는데, 중국말이 어색한 탓에 훈은 애나의 말에 짤막한 중국어 ‘화이(안 좋네요)’, ‘하오(좋네요)’로만 대답했다. 이를 해석하는 데 긴 번역기나 파파고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사람이 소통하는 데 언어는 수단일 뿐임을 방증하는 듯했다.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으로 하정우, 전도연 주연 ‘멋진 하루(2008)’ 정도가 떠올랐다.

엔딩 크래딧이 오를 때 생각했다. 분명 ‘해피 앤딩’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해비(Heavy) 엔딩인 셈. 애나는 연인 ‘보니 앤 클라이드’처럼 끝내 교도소를 탈옥해 파멸적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무게감 있는 마무리가 여운과 감동, 사유할 수 있는 심적 공간을 비워주는 것 같았다.

초겨울 탕웨이의 근작 ‘헤어질 결심’의 찝찝한 마무리도 겹쳐 보였다. 늦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들어선 요즘에 느낄 수 있는 어떤 허무 같기도 했다.

‘만추: 리마스터링’은 현재 티빙, 웨이브, 시리즈온, 쿠팡플레이 등 OTT 서비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