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강대국의 조건
  전체메뉴
[이덕일의 ‘역사의 창’] 강대국의 조건
2023년 02월 02일(목) 01:00
동서 냉전이 채 끝나지 않은 1987년 예일대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을 출간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강대국의 조건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중시하면서 양자 사이의 균형이 강대국의 지속 가능한 척도라고 보았다. 경제가 커질수록 이를 지켜내기 위한 군사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군사력의 지나친 확대는 재정 악화를 불러와 강대국의 쇠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경제가 몰락하면서 강대국의 패권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맞서 경제 능력 이상의 군비 경쟁을 벌이던 소련이 1991년 몰락한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케네디는 또 미국의 패권은 끝났으며 일본이 곧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강대국이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지만 일본이 쇠퇴하면서 그런 전망은 무색해졌다.

필자가 ‘강대국의 흥망’에 주목한 것은 이런 분석 외에도 강대국의 조건에 민주주의 정치 체제 여부는 상관없다고 봤다는 점이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언’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패배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에 따라 앞으로 세계는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이슬람 사이의 종교전쟁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만 봐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낙관적 전망은 오류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강대국의 조건에 민주주의 정치 체제 여부는 상관없다는 폴 케네디의 말은 한때 전 유럽을 거의 지배했던 나치 독일과 현재의 중국을 보더라도 실감난다. 중국은 1989년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경제는 자유를 허용하되 정치는 더욱 억압하는 반(反)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갔음에도 국력은 더욱 성장해 미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젠 패권주의 속내를 숨기지도 않는다. 중국이 더 이상 패권국가의 속내를 감추지 않는 시발은 2006년 11월 중국 중앙방송의 경제채널(CCTV-2)에서 12부작으로 방영한 ‘대국굴기(大國굴起)’에서 뚜렷했다. 유럽 각국 및 일본과 미국의 부흥과 몰락에 대해 탐구한 이 역사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21세기 ‘사회주의 중국’의 패권이다. 마지막 12부가 ‘대도행사(大道行思)’라는 제목의 ‘21세기 대국의 길’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한국은 어떤가? 미국의 ‘US뉴스앤월드리포트’(USNWR)는 2022년 12월 31일 ‘2022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the planet’s most powerful countries)‘ 순위를 발표했다. 강력한 국가 1위는 미국, 2위 중국, 3위 러시아, 4위 독일, 5위 영국이었다. 우리로서는 어쩌면 뜻밖에도 6위가 대한민국이었다. 지난해 6위였던 일본이 8위로 뒤처지고 8위였던 한국이 6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위상 변화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 강대국은 자국의 역사관을 가지고 독립적인 노선을 걷는 나라여야 하는데 아직 한국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이 지배하고 있고, 한 세기 전에 만들어진 일제 식민 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해 미래의 국가 지속 가능성을 우려해야 할 지경이다.

광복 후 한국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했다. 정치권은 이 토대 위에서 사회 통합과 남북통일의 담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 과거의 담론에 머물며 국민들을 갈라치기해서 싸움을 붙이는 차기 총선 소책(小策)에 목숨 걸고 있다. 서론에서는 늘 일제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본론에 들어가면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역사학자들이 여야 정치권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강대국이 되려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두 나라가 모두 한국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독립변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정치인들과 역사학자들이 우리 사회의 신주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