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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시 한 구절의 울림에서 시작된 한 여인의 이야기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원명희 지음
2022년 08월 07일(일) 09:00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나타사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시를 모티브로 한 소설은 시 구절이 지닌 강렬함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 시에서 창작의 질료를 뽑아낸다는 일은 창작 그 이상의 감각과 감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비범한 재능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실제 경험이나 상상력을 모티브로 소설을 창작한다. 소설은 장르적 특성상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허구나 온전한 상상력만으로는 직조화할 수 없다. 반드시 그 ‘무언가’를 전제로 한다. 언급했듯이 이색적인 경험이나 핍진한 체험, 기발한 상상력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재가 아닌 ‘시 한 줄’을 모티브로 장편 소설을 펴낸 이가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원명희 소설가(74). 원 작가는 최근 두 번째 장편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낮과 밤)를 발간했다. 소설 제목은 백석 시인(1912~1996)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구절을 차용했다.

원 작가는 “이번 소설은 시인의 시에 혼을 뺏기고 절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평생을 산 한 여인의 이야기”라며 “실제 우리와 함께 살다간 이 여인을 생각하며 감히 상상하고 그 뜻을 그리워했다”고 창작 배경을 밝힌다.

소설은 역사적 인물인 백석 시인과 그의 연인 자야의 이야기를 원텍스트로 다양한 사건과 상상이 씨줄, 날줄처럼 엮여 한 편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수렴된다. 특히 백석의 시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서사가 진행돼 고아한 맛과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알려진 대로 백석은 젊은 시절 자야(김영한)라는 여인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 20대 영어 교사 시절 요릿집에서 처음 만난 인연은 백석의 문학 인생에 큰 전환점을 준다.

소설은 자야로 치환되는 난영이라는 여성과 (백석)시인이 주인공이다. 집안이 가난했던 난영은 거문고와 가야금, 창을 배워 최고의 기생이 된다. 난영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가 유학을 권유하지만 불행하게도 독립자금 문제가 불거져 함흥 감옥소에 수감되고 만다. 난영은 그 후원자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일생의 단 하나의 정인’ 시인을 만난다. 그러나 6·25라는 시대적 운명과 집안의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결국 남과 북으로 갈려 생이별을 하게 되고 난영은 서울에서 요릿집을 운영해 큰 돈을 번다.

소설 중간 중간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에피소드와 주변서사들이 흥미롭다. 상상이 쌓아올린 이야기는 오래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난영이 요릿집에서 일하던 여자애가 낳은 아이 ‘위대한’을 지극정성으로 키워 미국의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키운다는 내용, 돈에 눈이 먼 난영의 사촌이 그 핵물리학자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인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이후 난영은 일본 교포와 연결돼 중국을 거쳐 북으로 가게 된다. 마침내 50년 만에 그토록 그리웠던 시인을 만나지만, 시인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다.

헤어지면서 시인은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난영에게 건넨다. 거기에는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고 적혀 있다. 난영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마음 속에도 ‘시인이 어디에 있든 나한테 오지 않을 리 없다’는 문구가 화인처럼 박혀 있다.

국내로 돌아온 난영은 천 억대의 자산인 월성각을 스님에게 시주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새벽 예불 드릴 때 3번의 범종을 쳐 달라. 한 번은 시인을 위해, 또 한 번은 죽은 양아들 위대한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이 있는 기생들을 위해…”

소설의 실제 인물 자야(김영한)는 지난 1999년 11월 14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생전의 그는 “1000억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 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동을 받아 선뜻 대원각을 시주했다. 오늘의 길상사는 김영한의 그러한 고귀한 정신이 주춧돌이 돼 창건될 수 있었다.

원 작가는 “세월이 흘러 인생 뒤안길에서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부끄럽게도 작든 크든 ‘넋’ 하나 건지지 못한 거 같다”며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침침한 눈을 부비며 영혼에 군살이 배도록 쓰고 또 썼다”고 소회를 밝혔다.

<낮과 밤·1만8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