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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에 생각한 것들-장석주 시인
2021년 09월 03일(금) 02:00
장석주 시인
가을의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밤의 서늘한 기운을 품은 풀벌레 소리의 데시벨이 부쩍 높아졌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풀벌레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마치 영원의 저쪽에서 보내는 신호 같다. 몸 안의 가장 작은 뼈인 추골·침골·등골 등을 통해 이 소리가 전달된다. 이 청각의 기적을 타고 가을밤의 쓸쓸함과 멜랑콜리가 몰려온다. 물론 내 상태는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삼켜야 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19세기 초 런던 거리에는 약 4만 개의 가스등이 켜졌다. 헤드랜턴도 손전등도 없던 시절 작가 디킨스는 불면 때문에 축축한 습기와 안개가 짓이겨진 어둠이 유령처럼 떠도는 런던 거리를 쏘다녔다. 촛불과 고래 기름을 써서 어둠을 밝히던 시대는 빠르게 지나갔다. 백열구가 나오고 산업사회로 진입한 뒤 인공조명들이 밤을 장악한다. 그리고 빛과 소음 공해에 의해 밤은 잠식되었다. 이론적으로 인간은 밤하늘에서 3000개의 별을 식별할 수 있다지만, 많은 별과 은하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에 따라 빛과 어둠의 순환주기가 깨졌다. 많은 양서류와 파충류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 생태적 교란에 빠졌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는 밤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저 선사시대 인류의 뇌에 눌어붙어 있던 두려움이 유전된 탓이다. 밤마다 맹수들이 포효하고, 재앙은 어디서 덮칠지 몰랐던 시대에 밤은 지옥의 휘장이었다. 밤이면 소등과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중세 때까지 밤은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는 위험한 시간으로 인지되었다. 악령들이 출몰하는 미지와 불가사의의 시간, 갖가지 범죄들이 들끓는 시간에 인류는 전전긍긍했다. “밤은 인간 최초의 필요악이자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출몰하는 두려움이다.”(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현대에 와서야 밤에 덧씌워진 사악한 이미지가 벗겨지고, 인류는 밤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다. 밤은 개와 늑대가 분별이 되지 않는, 땅거미가 질 때부터 시작한다. 해 진 뒤 사위가 어둠에 갇힐 때 낮은 어둠에 삼킨다. 땅거미(gloaming), 닭 가두기(cock-shut), 더듬거리는 시간(groping), 까마귀 시간(crow-time), 낮의 대문(daylight’s gate), 올빼미 빛(owl-leet) 등등. 이 어름을 가리키는 영어 관용구들은 많고 많다. 야생의 밤은 달빛과 별빛을 빼고 나면 캄캄하다. 그 어둠 속에서 큰 고양잇과를 비롯한 야행성 동물과 올빼미와 같은 조류들이 움직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좇는다.

밤은 잊힌 우리 삶의 절반이다. 우리 생의 절반은 밤에 빚어지지만 그 절반의 의미와 비중은 간과된다. 밤의 일은 낮의 노동과 성취에 견줘 대단치 않다고 여긴다. 무심코 밤을 잠과 꿈의 시간으로만 분류한다. 모든 밤은 그 이상이다. 밤은 낮의 노동이나 낮의 근심으로부터 휴식과 해방을 가져다준다. 또한 밤은 사교와 성과 고독의 시간을 베푼다. 우리가 결락시킨 밤에 이루어지는 감정생활을 비롯해서 밤에 은밀하게 일어난 일들을 합해야만 인간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지구를 밝히는 최대의 조명기구는 태양이다. 천문학자 쳇 레이모가 말하듯이 ‘태양은 몇 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원반 속의 별 하나일 뿐’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광원은 지구의 낮을 온전하게 밝힌다. 밤의 시작과 함께 이 조명기구는 돌연 꺼진다. 부엌·뒷마당·풀숲은 어둠에 잠기고, 밤이 우리의 시각을 회수해 간다.

달이 어둠 속에서 작은 조명기구 구실을 할 때 나는 가을밤의 고요, 쓸쓸함, 멜랑콜리를 맞는다. ‘세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갈망’이라는 에릭 G. 윌슨의 말에 동의하는 한에서 나는 멜랑콜리를 좋아한다. 그것은 차라리 가을밤의 특권이다. 가을밤에는 잠들고 싶지 않다. 오래 깨어서 명징한 의식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둠을 찢고 삼키는 일이다. 나는 낮보다 밤을 더 충만한 의미의 시간으로 향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