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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④
충경공 이정란, 64세에 의병청 설치 전주성 지켜
[열사 최욱] 백년산서 위장성세로 왜적 막아내
[소포 나덕명] 길주성 주둔 왜적 기습 백성 구해
[습성 임환] 광양 왜교 전투 선봉장으로 참여
2021년 07월 23일(금) 05:30
광주에서 태어난 해광 송제민은 김천일 의병의 종사관으로 복무했으며, 병참노선을 확보하기 위해 별도로 움직였다. 김천일이 진주성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등산에 칩거하며 ‘와신기(臥薪記)’를 썼다. 송제민을 배향한 광주시 북구 화암동 운암서원 내 묘정비.
의병장들의 정규 훈련을 받은 적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들과 맞섰다. 남도 의병은 충남 금산성, 수원 독산성, 경남 진주성 등 타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섬없이 처절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점에서 그 구국충절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명시된 의병장들의 전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오천 김경수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고경명에게 의병 20명과 함께 쌀과 화살 등 물자를 지원했던 김경수는 고경명이 1592년 7월 10일 금산전투에서 숨지자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해 11월 17일 거병했다. 자신은 맹주가 되고 의병장은 오봉 김제민을 추대했다. 1,000석의 군량을 모아 200석은 영광 법성포로 보내 의주로 운송하게 하고, 100석은 곽재우, 72석은 서연에게 보냈다. 1593년 6월 1일 장성현감 이귀와 정예군 40명을 선발해 담용군이라 부르고 조련에 들어갔다. 6월 3일 아들 극후, 국순, 종제 인혼에게 군사 836명과 군량 692석을 건네고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와 함께 진주성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진주성에서 아들 둘은 순절했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제 신남에게 원수를 갚아줄 것으로 울음으로 부탁해 2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군했다. 8월 25일 전주, 여산을 거쳐 안성으로 나간 김홍우 등 경수의 의병은 왜적 32명의 목을 베고 17명의 백성을 구출해냈다.

열사 최욱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최욱은 임신 8개월의 오씨 부인 등 가족들을 흑산도로 피신시키고 300여 명의 장정, 어린이 및 부녀자, 노인 등을 모아 거병했다. 9월 10일 왜적의 첩자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 동강면 월송리에서 10여 명이 내리자 최욱이 도리깨를 들고 나가 무찔렀다. 이후 다시 찾은 왜적에 대응해 매복해 있다가 활과 기름으로 왜적 선박 10여 척을 불태워버렸다. 대규모 침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최욱은 인근 백년산으로 곡식과 무기를 옮기고 화포도 구했다. 산 위에 군사를 배치했는데, 1,000여 명의 왜적이 쳐들어오자 곳곳에 깃발과 허수아비 등 위장성세로 막아냈다. 영암에서 거병해 율치에 진을 치고 있던 김덕흡에게 구원 요청을 받아 백년산에서 이동하는 도중 왜적을 만난 최욱은 끝까지 대항하다 44세 나이에 조총을 가슴에 맞고 전사했다. 임신중인 오씨 부인이 아들을 낳으면서 대를 이었다.

소포 나덕명

38세의 나이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경북도 경성으로 귀양간 나덕명은 함께 귀양을 간 한백겸, 서성 등과 의병소로 가 합세했다. 정문부가 의병장을 맡았고, 나덕명은 1592년 10월 21일 원충서, 한인제 등과 함께 길주성에 주둔한 왜적들을 기습해 남녀 백성과 말 100필을 되찾았다. 적의 머리 800여 개를 베어 귀를 잘라 선조에게 보냈다. 1593년 1월 19일까지 길주성 공격에 주력한 나덕명은 인근 서천군에서 도움을 요청하자 정병 200여 기를 거느리고 가 왜적 100여 명을 사살했다. 다시 길주성 앞에 왜적들이 모이자 1월 27일 정문부와 합류한 나덕명은 28일 구원에 나선 왜적을 공격해 길주성으로의 진입을 차단했다.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5년만인 1594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1596년 부친인 나사침이 타계해 삼년상을 치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화순 동복에서 왜적을 막았다. 이후 무안군 일로면 몽탄강(당시 주룡강) 위에 적벽정을 짓고 소일했다. 이 적벽정에는 영암으로 귀양가던 곽재우가 잠시 머물며 덕명과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해광 송제민

송제민은 양산숙, 임환, 양산룡, 이광우, 서중후 등과 김천일 의병의 종사관으로 복무했다. 북진하던 김천일 의병이 수원성에 입성하자 후방의 왜적 차단과 병참 노선 확보를 위해 충북 옥천으로 남하했다. 조헌의 도움을 받아 의병과 군량을 모아 김천일에 건넸다. 제민은 고경명의 전사한 후 그 뒷수습을 하면서 경기, 호서, 호남을 잇는 통로를 확보하는데 동분서주했다. 1593년 6월 진주성에서 김천일이 사망하자 자책감에 무등산에 들어가 와신기(臥薪記)를 썼으며, 이름을 기존 ‘濟民’에서 ‘齊民’으로 바꿨다. 구국제민(救國濟民)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였으며, 자신의 자 역시 이인(以仁)에서 사역(士役)으로 했다. 1593년 11월 나라의 존망이 호남에 있다고 보고 김덕령을 찾아가 거병을 권유하고 의병청을 설치하자 제주까지 가 말 30필을 구해 건넸다. 또 덕령을 대신해 격문을 보내고 칼, 창 등 병기를 마련했다. 제민은 덕령의 옥사 소식을 듣고 혼절했으며, 조정이 왜적과 강화하자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향했다가 명나라 군과의 갈등으로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의 첫째 아들 타는 이순신 수군에 종사하다 전사했고, 둘째 장은 왜적에 붙잡혀갔다 되돌아왔으며, 셋째 집 역시 종군했다. 8년의 전쟁이 끝나자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 죄인을 자처하고 무안에 은둔했다.

삽봉 김세근

임란 발발과 함께 고경명 의병에 합류했던 김세근은 몸이 아파 고향인 광주 서창으로 돌아왔다. 이후 몸이 좀 나아지자 1592년 6월 12일 조헌의 격문에 300여 명을 모아 거병했다. 백마산(좌청룡), 옥녀봉(우백호), 요치(남주작), 화개산(북현무) 등으로 둘러싸인 명당 수원골에서 수련한 뒤 부인 한씨와 12세의 아들 추남에게 유서와 요도(腰刀)를 건넸다. 한씨 부인에게는 “이 칼이 녹슬거나 변색하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라고 전했다. 관군 패잔병 200여 명이 합류하면서 500여 명으로 규모가 늘어났고 6월 27일 충남 금산(진산)으로 진을 옮겼다. 안국사 에께이(惠瓊)가 이끄는 왜적을 4차례 무찌른 세근은 7월 9일 금산에서 고경명과 만났다. 금산성 서문 공격을 맡은 세근은 남문과 동문을 공격하던 관군이 후퇴하면서 성에서 쏟아져 나온 왜적에 포위되며 7월 10일 전사했다.

습정 임환

김천일 의병의 종사관으로 참여한 임환은 나라의 근본이 호남이라고 주장하고, 의주행재소와 삼남의 연계를 주장했다. 김천일 의병이 강화도에 진을 치자 40여척의 선박으로 한양 공략에 나서 양화진에 정박한 뒤 왜적을 야간기습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1593년 명나라 개입에 따라 강화회의가 진행됐음에도 계속 선박 이끌고 사현(서울 서대문구 모래내)까지 육박해 소규모 유격전을 벌여 왜적들을 살육했다. 김천일을 설득해 왜적의 식량 창고인 용산창을 불사르기로 하고 양산숙과 함께 특공대 대장을 맡아 수십만석을 불태우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김천일의 지시로 한양과 경기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1593년 4월 왜적이 한양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김천일과 함께 한양에 입성했다. 선조는 임환에게 사포별제를 제수했으며, 병을 얻어 잠시 나주로 돌아왔다. 이후 김천일, 양산숙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관한 그는 덕개(영암군 삼호면 덕호리)에 은둔하며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우선 이순신에게 쌀 수백석을 모아 제공하고 나주로 돌아와 격문을 써 의병 300여 명을 모아 초의군으로 명명했다. 초의장을 맡아 순천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함평, 영암 등지에서 우국 선비들과 합류해 명나라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적 공격을 계속했다. 제3차 광양 왜교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해 바다로 도망가는 왜적을 추격해 사살해 공을 세웠다.

충민공 양산숙

양산숙은 31세에 임란이 발발하자 형인 산룡과 함께 김천일 의병에 들어가며, 막내 산축에게는 홀어머니 봉양과 군량미 모집을 당부했다. 1592년 12월 김천일의 상소문을 가지고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했다. 선조는 산숙에게 공조좌랑을, 김천일에게 창의사를 각각 제수했다. 진주로 향하다 대구에 있는 명의 총병 유정에게 지원 요청을 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진주성으로 혈혈단신으로 들어갔다. 동행한 홍함이 도망가자 크게 탄식했다. 산룡은 군량 운반 책임을 맡아 진주성 밖에 있었으며, 산숙은 진주에서 뒷날을 기약하라는 김천일의 부탁에 “의리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자결했다.

충경공 이정란은 남고산성에 주둔하며 왜적 700여 명을 사살했다. 남고산성은 후백제 견훤이 전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충경공 이정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지 2개월 만에 임란이 발발하자 64세의 나이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주위에 격문을 돌린 이정란은 집안 재산을 정리해 병기를 마련했다. 500여 의병으로 비어있던 전주성을 지켰다. 정협과 윤계를 종사관으로 삼아 군령을 엄하게 하고 화살 하나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남하하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수천의 왜적이 1592년 7월 9일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격하자 군세를 위장하기로 마음먹은 정란은 전주성 외성인 남고산성에 깃발 수만개 배치하고 억경대에서 먼지를 일으켜 공략을 막았다. 동쪽에 진을 치고 있던 정협에게 남고산성 요로에 매복하도록 지시해 왜적 척후병 4명을 붙잡아 3명을 죽이고 1명은 전주성에 대규모 군사가 주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풀어줬다. 한밤중에 성밖에 주둔한 왜적을 기습 공격해 700여 명을 사살했다. 이후에도 왜적은 전주성을 침략했으나 정란의 허장성세 전략에 속아 철수해버렸다. 명과 왜적의 강화회의로 전쟁이 소강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관직에 나간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주성 부장을 맡게 됐다. 68세의 정란은 자신의 전략을 전주부윤 박경신이 반대하자 상경해 조정 중신들에게 호소, 전주부윤과 삼도소모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전주성으로 돌아오자 이미 박경신은 군량을 모두 불태우고 달아난 뒤였다. 왜적이 후퇴하자 명나라군의 약탈을 말리고 왜적을 쫓아가 300여 명을 죽였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