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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식칼럼] ‘세상만사 운수소관’이라지만
2021년 01월 27일(수) 05:00
정후식 칼럼-논설실장·이사
신년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한 해의 첫머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데, 올해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코로나19 사태로 평범한 일상마저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담배는 끊고 책은 가까이, 소식(小食)하고 가까운 거리는 걷기, 하루 10분 외국어 공부하기 등등. 연초가 되면 단골로 소환되는 이들 계획은 소소한 희망과 기대를 안겨 주지만 지속적으로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지어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속담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낼모레면 설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음력 1월 1일, 두 번째(?)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양력과 음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이 시간의 지체는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양력 새해의 결심이 작심삼일에 그쳤더라도, ‘패자 부활전’처럼 한 번 더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지가 약해졌다면 이때를 맞아 또다시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뭔가 다시 시작한다면 마치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너스를 받은 기분 아니겠는가.



잠시 느슨해진 방역의식 다잡아야

새해를 설계하듯, 해마다 정월 초승이면 행해졌던 세시풍속이 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이나 사주를 보며 한 해의 신수(身數)와 길흉화복을 점쳐 보는 일이 그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늘 자식 걱정이 앞섰던 어머니도 내 어릴 적 정초가 되면 용하다는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시곤 했다. 엄동설한에도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차례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괘(卦)를 받아 오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신이라며 짐짓 외면하면서도 행여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달뜬 마음으로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늘 ‘물가에 가지 마라’ ‘언행을 조심하라’ ‘역마살이 끼었다’는 등 금기와 경계의 문구가 대부분이었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새해 운세에 대한 관심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지금도 여전하다. 오히려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 사주 앱, 유튜브 타로 등을 통해 게임을 즐기듯 쉽고 편하게 운세를 볼 수 있다. 애써 점집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접근성이 향상된 것이다. 특히 취업난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위안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탓일까. 우리나라 국민 절반가량이 코로나19 감염에 대해 ‘어느 정도 운이다’거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다’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감염병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운명론적·결정론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 팀이 지난해 11월 전국 성인 남녀 1076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가 감염되느냐 마느냐는 어느 정도 운이다’는 답변이 46.1%에 달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다’는 의견도 46.8%나 됐다. 특히 젊을수록 코로나 감염을 운명론적으로 인식하는 비중이 높았다. 본인의 감염이 운에 달렸다는 응답은 20대에서 56.6%에 달했고, 30대(51.2%)와 40대(51.0%)에서도 절반이 넘었다. 반면 자신이 감염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 명 중 한 명만 ‘높다’고 응답할 만큼 낙관적 편견이 넓게 퍼져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수차례 코로나 대유행의 파고 속에서 방역 대책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음에도 확진자는 매일 늘어나고,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됐다. 게다가 방역에 대한 피로감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코로나 감염이 어쩌면 운수소관(運數所關)이나 팔자소관(八字所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국민 절반 “코로나 감염도 운이다”

하지만 감염병이 운에 따라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방역 수칙 준수 등 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 또한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미리 정해진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경계 의식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년 이상 계속된 방역 당국과 시민들의 노력에도 급속한 확산을 차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등에서 발견된 변이 바이러스는 전파력이 더욱 강해 향후 방역의 최대 변수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동안 우리가 지켜본 것처럼,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코로나 대응은 운수 보기식 ‘복불복’(福不福) 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감염 여부는 전적으로 방역 수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 이미 마스크 착용과 거리 두기로 감염을 막아 낸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새해 운세를 알고자 하는 욕구도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굴복하거나 요행을 기대하기보다 삼가야 할 일들을 미리 살펴 근신하고, 의지와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맥락일 터.

그런 점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다져야 할 새해 각오는 철저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아닐까 싶다. 방역이 뚫리면 원대한 새해 결심도, 상서로운 운세도 별무소용(別無所用)이기 때문이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왔다지만 오는 9월까지 전 국민의 70%까지 접종을 완료해도 11월에야 집단 면역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때까지 공동체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은 방역 수칙 준수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