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목싸목 남도 한 바퀴] 장흥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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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목싸목 남도 한 바퀴] 장흥 볼거리
문림의향·정남진…역사와 문화 숨쉬는 문학의 고향
2020년 11월 10일(화) 07:30
해돋이와 굴구이로 유명한 남포마을 ‘소등섬’.
◇어부 무사귀환과 풍어 기원하던 소등섬=장흥군 용산면 상발리 남포마을 소등섬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길을 나선다. 소등섬은 서울에서 정남쪽으로 선을 죽 내려 그으면 닿는 정남진(正南津) 갯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에서 100여㎞ 1시간 30분 거리.

마을 앞 도로에서 작은 섬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지구별이 연주하는 웅장하고, 장엄한 교향곡을 듣는 듯하다. 어둠을 몰아내고 시나브로 밝아오며 변하는 ‘시각적’ 하늘과 바다빛깔,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청각적’ 파도소리가 공감각적으로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곳은 본래 죽포(竹浦)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남포(南浦)로 바뀌었다. 마을에서 100여m 떨어진 섬은 섬 겉모양새가 무쇠 솥뚜껑과 같다고 해서 ‘소등섬’ 또는 ‘소부덩(솥뚜껑의 장흥 사투리) 섬’이라고 불린다. 마침 남포를 찾은 때가 간조 때여서 걸어서 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섬 입구에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소등 할머니상’과 제단, 손 편지를 1년 후 배달해주는 ‘행운의 우체통’이 세워져 있다.

본래 소등섬은 마을에서 단(壇)을 설치해 당제와 갯제사를 모시던 신령스런 공간이었다. 당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1월 14일) 마련됐다. 제관(祭官)은 자기 집 입구에 황토를 깔고 왼새끼(왼쪽으로 꼰 새끼)로 금줄을 쳤으며, 소등섬 역시 왼새끼를 꼬아 주위에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제사음식은 마을 공금으로 5가지 곡식과 3가지 과일 외에 돼지머리, 닭, 마른명태, 술을 마련했다. 특히 물은 마을에서 동쪽으로 1㎞ 떨어진 옹달샘물(영천)만을 사용했다. 당제가 끝나면 농악대가 섬으로 들어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갯제사를 이어서 올렸다.(장흥문화원 ‘용산면지(誌)’ 1995년)

또한 남포마을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1996년)의 무대이기도 하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고기잡이배는 동력화되고, 날씨마저 예측할 수 있게 됐지만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주민들의 마음은 변함없을 것이다. 찬바람이 불면 여행자들은 마을에서 해돋이를 보고난 후 굴 구이를 맛볼 수 있다.

미백 이청준 작가 ‘문학자리’.
◇득량만 바다와 문학 길=“회진포구가 품은 득량만은, 가히 소설의 길이고, 소설의 바다가 아닐 수 없다. (중략) …회진항에서 남포까지 이어진 장흥의 해안도로는 굽이마다 이야기가 맺혀있고, 또 태어난다.”

장흥이 고향인 이대흠 시인은 지난 2016년 펴낸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원’(문학들 刊)에서 “장흥 문학에서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을 기적이라고 한다면, 이승우는 축복이다”고 말한다.

소등섬에서 회진항에 이르기까지 눈길 닿는 섬과 바다가 장흥 태생 작가들의 소설 속에 살아 숨쉰다. 또한 회진면에서 천년학 세트장~선학마을~진목리~이청준 문학자리(묘소)로 이어지는 지방도는 ‘이청준 소설문학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진면에서 가장 높은 공지산 아래 자리한 산저(山底)마을은 남도사람의 한(恨)과 소리를 담아낸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작품배경이 된 마을이다. 영화 개봉이후 각종 매체에 소개돼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오자 주민들은 기존 농사를 버리고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메밀을 심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마을이름을 선학동으로 바꾸었다.

미백(未白) 이청준 작가의 고향인 진목리는 사방이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참나무가 많아 ‘참냉기골’로 불렸다. 생가(진목1길 9-3)는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집안 내부에는 작가의 문학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게시돼 있다. 2008년 7월, 6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는 마을에서 머지않은 갯나들에 잠들어있다. 양지바른 그의 ‘문학자리’는 들녘과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작가는 “내 삶과 문학에 대한 은혜를 따지자면야 삶을 주고 길러준 고향과 그 고향의 얼굴이라 할 ‘어머니’를 앞설 자리가 없으리”라고 술회한 바 있다.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소설 ‘눈길’ 중)

안중근 의사를 배향한 '해동사'.
◇안중근 의사 혼(魂) 살아 숨 쉬는 해동사(海東祠)=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구내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안중근(1909~1910) 의사(義士)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밀원 의장을 브라우닝 권총으로 저격하는 소리였다. 안 의사는 체포되기 전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1955년 10월 27일. 장흥에서 안중근 의사 위패 봉안식이 열렸다. 영정사진을 든 딸 안현생 씨와 위패를 모신 5촌 조카 춘생 씨 뒤로 장흥 유림과 지역 인사,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봉안식 참석자들은 장흥읍 동교다리를 건너 장동면 만년리 만수마을에 마련된 해동사(海東祠)까지 10여㎞를 걸어서 이동했다.

해동사는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추모제향을 봉행하는 국내 유일의 사당이다. 장흥향교 전교를 지낸 의산(義山) 안홍천 선생은 1951년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만수사(萬壽祠)를 짓고 난 후 ‘같은 뿌리인 순흥 안씨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국내에 없어 제사조차 지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안 의사 사당건립에 발벗고 나섰다. 죽산 안씨 문중과 지역유지들이 뜻을 같이 하며 성금을 보태 1955년 만수사내에 1칸 규모의 사당을 세웠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안 의사 추모공간 조성 소식을 듣고 ‘해동명월’(海東明月) 휘호를 내렸다.

사당 내부에는 안 의사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시·분침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9시 30분에 멈춰있다. 또 이 대통령의 ‘해동명월’ 휘호와 안 의사의 ‘제일강산’(第一江山)과 ‘극락’(極樂) 등 유묵(복제본)이 전시돼 있다.

2020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장흥군은 올해를 ‘정남진 장흥 해동사 방문의 해’로 정하고 안중근 의사 사당 성역화사업 추진에 나섰다. 앞으로 안중근 의사 체험교육관과 메모리얼 파크, 애국 탐방로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메모리얼 파크에는 안 의사를 비롯해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윤동주 시인 등 애국지사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보림사에서 장흥 여행을 마무리한다. 사찰 뒤편 가지산자락 비자나무숲에 조성된 오솔길은 ‘청태전 티로드’로도 불린다. 옛날 동전 모양을 한 발효차 ‘청태전’(靑苔錢)은 장흥 녹차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산물이다. 오후 6시 범종이 울린다. 발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마주한다.

“먼 보림사 범종소리 속에/ 가지산 계곡 예쁜 솔새가 살고,/ 그 계곡 대숲의 적막함이 있다./ 9월 저녁 햇살도 비스듬하게 세운./ 난 이 범종소리를 만날 때마다/ 이곳에서 참빗을 꺼내/ 엉클어진 내 생각을 빗곤 한다.”(김영남 ‘보림사 참빗’ 전문)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장흥=김용기 기자 ky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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