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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를 깬 범인을 찾아서
심 옥 숙 인문지행 대표
2020년 10월 26일(월) 07:10
인문지행 대표 심옥숙
‘확증 편향’이라는 표현은 요즘 흔히 쓰이지만 알고 보면 무서운 말이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진실이라고 믿으며 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본다는 의미다. 그럴수록 진실은 은폐되거나 조각나고 왜곡되기 쉽다. 이런 문제를 다룬 작품이 독일의 대표적 희극 ‘깨어진 항아리’(1806)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고, 범인이 의도와는 달리 스스로를 폭로해 가는 구성을 통해서 법체계 자체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깨어진 항아리’의 작가는 독일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깨어진 항아리’는 네덜란드 농촌의 작은 마을에 있는 한 집안에서 아끼던 항아리가 밤사이에 깨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밤에 누군가 이 집 딸인 에페의 방에 침입했다가 항아리를 깨고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에페의 어머니는 범인이 분명 딸의 약혼자라고 믿고 있다.

마을의 유일한 판사이자 촌장인 아담이 범인의 판결을 위한 재판을 주관해야 한다. 마을의 절대 권력자인 판사 아담은 탐욕스럽고 교활할 뿐만 아니라 호색가로 이미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다. 그런데 법정에 나타난 판사의 모습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당시의 판사라면 반드시 써야 하는 권위의 상징인 가발도 쓰지 않았고 머리에는 상처가 있으며, 몹시 불안한 모습으로 허둥거린다. 마침 에페의 어머니가 딸의 약혼자가 분명 범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나서자, 판사는 반색하며 일사천리로 판결을 서두른다.

하지만 사실은 마을 처녀 에페에게 접근하다가 들키게 되자 도망친 사람은 판사 아담이다. 창문을 통해서 급히 빠져나가다가 에페의 어머니가 아끼는 항아리를 깨트린 것이다. 그러니 판사에게는 다른 사람이 범인이 되는 것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다. 자기 대신에 힘없는 평범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쓴다고 해서 무엇이 대수겠는가. 거기에 에페의 약혼자가 범인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작가는 판사가 범행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과정을 놀랍도록 ‘정교하고 치밀하고’ 구성함으로써 진실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다. 범행을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판사의 범죄 사실이 차츰차츰 드러나는 방식이다. 마침내 결정적 증거인 판사의 잃어버린 가발이 에페네 집 근처에서 발견된다.

에페의 어머니는 진범에 대한 확증을 가진 채로 ‘어떻게, 왜 판사가 에페의 방에서’ 도망칠 수 있느냐며 기겁을 한다. 여기에서 범인에 대한 확증이 판사는 법을 행하며 지키는 존재이지, 법을 이용해서 범행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맹목적 믿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한 것일 뿐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마침내 판사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활함, 권력에의 도취로 스스로 빚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판결하는 법관과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한 사람이니 이보다 더한 자아분열과 혼란이 없다. 자신을 범인으로 판결할 수 없으니 범인을 만들어 내야 하고, 판사직을 내려놓을 용기가 없으니 거짓과 조작이 필요하다.

에페는 판사의 요구를 거절하면 약혼자가 전쟁터로 소집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있어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군대 소집 또한 판사의 조작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판사 아담은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범인의 모습으로 황급하게 도주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마냥 웃기만 할 수 없는 복잡한 내적 감정과 대면하게 된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법관에게 법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과 욕망·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 되는 것이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탓이다.

법을 이용해서 욕망을 채우고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작품 속 판사에 대한 분노는 현실 속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당연히 작품의 판사는 법체계와 구체적 법 실행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판사 아담으로 지칭될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행여 ‘아담 같은 판사’로서, 자신들만을 위한 ‘정의’를 진정한 정의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닌지 새삼 깊이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