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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가요~ 광주 최고 번화가 ‘충장로’ 속으로
역사와 추억 스민 충장로는 살아있다
2020년 10월 06일(화) 00:00
1920년대 이후 충장로 2가
‘광주의 명동거리’라고 불리는 패션의 거리 충장로.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만났다 하면 충장로였고, 특별한 날 가족들과의 나들이 필수코스였으며, 여학생들은 하교 후 특별한 일 없이도 충장로를 배회해야 하루 일과가 끝이 날 정도로 충장로는 광주 시민들의 자랑이자 모든 것이었다.지금은 그 명성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가족단위 방문객들의 나들이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100년의 역사가 훌쩍 넘은 충장로의 어제와 오늘, 충장로를 지켜온 상인들의 이야기, 이제는 전국구 브랜드가 된 ‘7080 충장축제’까지 충장로의 ‘그 시절’로 안내한다.



일제강점기 광주극장
-충장로의 시작

‘충장로’는 1가에서부터 누문동 144번지까지 1093m에 이르는 도로다. 충장동 출신 김덕령 장군(1567~1596)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46년부터 그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충장로 상가의 시작은 잡화상이다. 1917년 일본인 기다무라라는 사람이 광주 실정을 담은 책 ‘광주사정지(光州事情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광주 상업의 연혁은 하등의 기록이 없어 종래의 일을 상세히 알아볼 수 없다…명치38년 4월(1905년 4월) 이쓰쓰씨가 잡화상을 개점한 것이 처음이다…’

광주시사(市史)에는 또 이렇게 기록돼 있다. ‘한일합병 다음해(1911년) 일본상인 우오다니라는 사람이 광주에 와서 현 산업은행 광주지점 건너편에 감옥이라는 옥호로 일용잡화점을 차린 것이 효시가 돼 점차 본정(충장로) 일대에 일인 상가를 이루게 됐던 것이다’.

각자 다른 기록으로 남아있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본인이 상가를 시작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한일합방 전후로 일본인들이 광주로 진출하면서 일본 상인들도 속속 광주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상점을 차린 곳은 대부분 현 ‘광주충장로우체국’을 중심으로 한 충장로 1~2가 일대였다. 이후 1920년을 전후해 한국인들도 충장로에 점포를 차리기 시작했다. 한국인 상인들은 대부분 행상이나 노점상 정도였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들이 문을 연 곳은 충장로파출소 밑에서부터 시작되는 충장로 4~5가 일대였다.

1920년대 후반 규모있는 한국인 상점들이 생겨났다. 1~3가 일본인 거리, 4~5가 한국인 거리로 형성된 충장로 상권은 해방전까지 이어졌다.

해방 이후 충장로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충장로 등 광주 중심가 상점의 70~80%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상점들이 문을 굳게 닫았다. 귀국길에 오른 상인들은 점포를 인계해주거나 매매하기도 하고 아예 문을 닫아 놓은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해방이 됐다고는 하지만 이때만 해도 충장로는 침체기였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석유배달 자전거
-충장로의 전성기

1950년대 후반기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충장로 5가 구 역전통 사거리는 잡화상 전성시대였다. 양동시장과 계림시장 등 시장 상인들이 일정한 점포를 잡아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잡화상가가 형성됐다. 상인들의 번창은 물론 광주 상업의 호남권 시대를 열어 놓은 시기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충장로 상가구조가 새로운 형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임대 백화점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아케이드와 슈퍼마켓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의류·잡화를 중심으로 충장로 1가 옛 무등극장 건물에 무등아케이드, 충장로 3가에 동아아케이드가 생겨났고 이후 충장로 2가에 고려아케이드, 금남로 1가에 코스모스아케이드, 부래옥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1974년에는 정부의 생필품 가격안정 정책에 따른 유통구조의 현대화 계획에 따라 슈퍼마킷들도 문을 열었다.

1980년대 충장로의 가장 큰 변화는 충금 지하상가와 자영(自營)백화점의 등장이다. 80년 11월에 중앙로 확장과 함께 지하상가 시대를 열었으며 82년 9월에는 임대백화점으로 시작한 화니백화점이 광주 최초의 자영백화점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충장로 3가 옛 광주은행 본점 부지에 태산백화점이, 대인동 구시민관 부지에 한미쇼핑이, 충장로 3가에 가든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광주 백화점 시대를 열었다.

이 무렵 충장로 땅값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1989년 7월호 ‘월간 예향’에 광주 시내 땅값이 언급돼 있다.

“…한 건의 거래가 이루어질 뻔 했던 적이 있다. 충장로 2가 광주우체국 앞 7평의 화장품 가게다. 값은 5억원. 땅 한 평에 71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겠으니 팔라고 사정해도 땅 주인이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거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주시내 땅값의 신기록이 이루어질 뻔 했었다. …한국 감정원이 지난해(1988년) 7월 말에 발표한 전국의 땅값을 살펴보자. 광주 충장로 1~3가의 땅값은 평당 2640만원으로 여전히 최고다.”

이후 충장로는 첨단 유행·낭만의 거리로 자리매김 했다. 24시간 꺼질줄 모르는 네온 불빛과 조명등 아래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점포들, 발디딜 틈 없이 밀려드는 인파들로 ‘호남경제의 일번지’라는 신화를 이뤄냈다.



1919년 광주시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던 충장로 옛 광주우편국.
-불황 닥친 충장로

90년대 들어 불황이 찾아오면서 충장로도 예전의 활기는 사라져갔다. ‘바겐세일’, ‘점포정리’ 문구가 심심찮게 보였고 장사는 안되는데 매년 오르는 임대료나 월세 등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들이 많아졌다.

향토 백화점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1986년 개점했던 가든백화점은 광주 대표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가 IMF 이후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부도가 났고 1998년 그 자리에 의류 전문 쇼핑몰인 이프유(IF U)가 문을 열었다. 젊은층을 주 소비층으로 활기를 띠는가 싶었지만 구 도심권에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2010년 영업을 중단했다. 앞서 화니백화점도 1997년 부도를 맞았으며 송원백화점은 1998년 현대백화점으로 경영이 넘어갔다.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충장로로 불러들였던 극장들의 폐업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2000년 제일극장이, 2004년에는 현대극장이 문을 닫았다. 1920년 개관했던 무등극장도 2012년 폐업했다. 현재는 1934년 개관한 광주극장만이 예술영화 상영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대기업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롯데시네마가 2013년 제일극장을 리모델링해 재개장했고 CGV도 인근 거리에 두 곳의 영업점을 두고 있다. 충장로 4가에는 밀리오레를 인수한 이랜드그룹의 쇼핑몰 ‘엔씨웨이브’가, 가든백화점-이프유 자리에는 애경그룹의 복합쇼핑몰 와이즈파크가 영업중이다. 부활이라면 부활이겠지만, 씁쓸함이 남는 대목이다.



2010년 광주우체국앞. ‘우다방’으로 불리며 광주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됐다.
-2020 충장로

2020년의 충장로는 어떤 모습일까. 1~3가는 의류매장, 음식점, 카페, 액세서리, 통신사 등 젊은이들의 거리로, 4~5가는 한복거리, 도매상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경기 불황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장사가 안돼 문을 닫았다가 업종을 바꿔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열 집 건너 한 곳씩 공사 안전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전성기때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충장로는 여전히 광주시민들에게는 추억의 공간이며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기도 하다.

충장로를 지키기 위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광주시 동구는 올해 초 충장로1가 입구에서부터 광주충장로우체국까지 간판개선사업을 진행중이다. 충장로 2가 옛 학생회관 골목길을 중심으로 ‘K-POP스타 거리’도 조성중이다. 스타의 거리에는 유노윤호, 수지 등 광주 출신 케이팝 스타의 핸드프린팅, 스타들의 벽화 포토존, 히스토리 포토월, 휴식 쉼터 등을 마련한다. 11월내에는 K-POP 스타 거리에 ‘방탄소년탄’의 광주 출신 멤버 제이홉(정호석)에게 전하는 팬들의 메시지를 담은 조형물 ‘홉 월드(HOPE WORLD)’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보람 기자 boram@·사진=광주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