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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사진 한 장에 살아 숨쉬는 한국 근현대사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박건호 지음
2020년 07월 31일(금) 00:00
1945년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탁시위에서 연설하는 김구의 모습.
역사교사이자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의 저자 박건호는 30여 년 전 신석기문화를 체험했다. 대학 입학 후 강원도 오지로 첫 학술답사를 떠난 자리였다.

기원전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의 움집터가 발견된 곳에서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흥분한 그는 주위를 맨손으로 파헤쳤고 연이어 조개껍데기 화석, 동물 뼈 등을 발견했다.

“1만 년 전의 사람들과 접속하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자 바닷가 모래밭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토기를 굽고 있는 사람들, 조개로 만든 팔찌를 손목에 차고 놀고 있는 아이들, 물고기를 잡아서 마을로 돌아오는 남자들, 조와 수수를 수확해오는 여자들…….”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이후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학생을 가르치고 역사자료를 수집하는 삶을 산다. 이른바 ‘컬렉터’의 삶을 즐긴다. 우연히 찾은 토기 파편은 이후의 삶을 규정했다. 자료에 숨겨진 역사적 코드를 추적하고 옛사람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번에 저자가 펴낸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는 평범한 물건이 역사가 되는 순간을 조명한다. 한마디로 어느 컬렉터의 특별하고 가슴 뛰는 역사 읽기다.

흔히 ‘컬렉터’ 하면 오래된 유물이나 값비싼 예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저자의 수집품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진 한 장, 영수증, 일기, 편지, 사직서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묻어 있는 생활 자료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사소하지만 하나하나는 가슴 뛰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일기장, 팸플릿, 신문, 잡지, 생활 문서, 사진 자료만이 아니라 크기나 재질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그 자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어떤 것은 화난 표정을 짓고 있고, 어떤 것은 흥겨움과 기쁨의 감정을 담고 있다. 또 어떤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저자가 아끼는 수집품 중에는 낡은 태극기가 있다. 사괘를 먹으로 대충 그린 것으로 태극은 빨간색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빨간색 위에 파란색을 덧칠한 흔적도 있다. 추정하건데 광복을 맞은 사람들이 태극기가 없어 주위에 있었던 일장기를 배경으로 손수 태극기를 만들었다.

책은 19세기 말부터 유신체제가 만들어진 1970년대까지 시대상을 아우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은 여전히 당시의 감동을 선사한다. 우승 직후 직접 사인지 앞면에 한글 이름과 영어 이름이 적혀 있다.

이름 밑에는 ‘KOREAN’이라고 쓰여 있는데 ‘고개 숙인 챔피언’ 손기정은 작은 종이에 자신의 심정을 그렇게 써넣었다.

콜레라 창궐로 인한 귀향 명령 증명서도 눈에 띈다. 1946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을 하자 무안 공립농잠학교에서 학생 장상기에게 발급한 귀향 명령 증명서다. 당시에도 전염병이 돌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하는 조선인 지원병들의 모습을 보도한 ‘동맹뉴스.
한국전쟁 중 20대 청년의 전시 수첩은 지난한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전북 김제 출신 차영근 소대장이 전쟁 중 남긴 전시 수첩은 11개월에 걸쳐 쓴 일기다. 전쟁상황과 부대 생활을 깨알같이 적어 놓은 글에는 치열한 고지전의 참상과 가족,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녹아 있다.

이밖에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피로 쓴 사직서, 한국전쟁 중 포로수용소에 갇힌 청년이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등도 눈에 띈다.

수집품을 남긴 주인공 대부분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명한 이들이지만 이들이 수집품을 매개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볍거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너머의 세계로 안내하는 귀한 자료이며 그야말로 온전히 살아 있는 진짜 한국 근현대사’라고 강조한다.

<휴머니스트·1만8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