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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을 위한 정조의 곡산부사 임명
2020년 07월 14일(화) 00:00
[김 준 혁 한신대학교 교수(한국사 전공)]
‘풍운지회’(風雲之會). 바람과 범이 만나고 구름과 용이 만나듯이,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의 만남이니 참으로 귀한 만남이다. 다산 정약용 연구의 최고봉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풍운지회’라고 규정한다. 그만큼 다산과 정조의 만남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정약용을 나라를 이끌어갈 정승으로 만들고자 했다. 1795년(정조 19) 윤2월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화성 행차가 끝나고 한양으로 올라온 정조는 창덕궁 도착 다음 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이가환과 정약용을 불러 세운 후 채제공 다음에 이 두 사람을 정승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의 정치 주역들을 소개하고 이들이 정승이 될 훈련을 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동안 정조는 정약용을 자신의 옆에서 보좌하는 승지로 삼았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비서관이나 수석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정약용이 제대로 된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방 고을의 수령을 경험해 봐야 하고, 이를 통해 국가 전체의 행정과 정국 운영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 가장 문제가 심각한 지역에 정약용을 수령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바로 황해도 곡산도호부였고 이때는 1797년 윤6월이었다.

당시 황해도 곡산도호부는 전임 수령의 잘못으로 이계심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이계심이 백성들과 함께 온갖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곡산부사를 고을 밖으로 내쫓는 민란을 일으켰는데, 백성들이 얼마나 꼭꼭 숨겨 주는지 곡산부 관원들이 이계심을 체포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도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해 이계심이 무조건 민란을 일으킨 것이라고만 여겨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도주한 이계심을 잡기 위해 훈련도감을 포함한 오군영의 군사들까지 파견했지만, 번번이 그를 잡는 데 실패했다. 그랬던 이계심이 제 발로 곡산부내로 들어가는 정약용 앞에 나타났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포박하거나 목에 칼을 채우지 않고 관아로 데려가 갑자기 신관 수령의 부임 행차에 나타난 연유를 물었다.

이계심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적은 12조목을 건넸다. 거기에는 정약용 부임 직전 서리들이 포보포(砲保布, 포군에게 내는 군포) 대금으로 200전을 걷어야 하는데 백성들에게 무려 900전이나 걷어 빼돌린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이어졌고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돼 1000여 명을 모아 관아에 들어가 호소한 것인데,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여러 정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이계심에게 무죄 방면을 내렸다. 그러면서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고 말했다.

이계심의 무죄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반겼지만, 조정에서는 수령의 권위를 붕괴시켰다고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정쟁까지 일었다. 하지만 현군인 정조가 정약용을 칭찬하면서 정쟁은 일단락됐다. 정조는 정약용이 수령으로서 해야 할 올바른 일을 했다고 칭찬해 주면서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 고을 수령들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결국, 이 일 이후 지방 고을 수령들이 더욱 책임감 있게 고을 행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정약용 역시 이때의 일을 기반으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쓸 수 있었다. 훗날 위당 정인보 선생은 정조와 정약용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위하고자 한다면 능력 있는 인사들을 과감히 발탁해 정약용처럼 직분에 맞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선택된 인재들은 더욱 노력해 과감한 판단과 올바른 결정으로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미래가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