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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고자료를 근거로 한 6세기설을 입증할 문헌자료는 없는가?
6세기 병합설과 중국 양직공도
중국 양직공도는 6세기설 입증
이병도 4세기설 뒤에야 알려짐
2020년 03월 25일(수) 00:00
중국 양나라 무제의 아들 소역이 만든 ‘양직공도’. (오른쪽부터 시작되는 두루마리 그림이며 백제 사신은 12국 사신 가운데 세 번째로 소개되어 있다)
양직공도 백제 사신의 용모와 189자의 기사.
양직공도 (백제 사신) 기사 전문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驪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其王餘?,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爲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백제는 동이 마한에 속하였다. (서)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서)진 이래 조공해 왔는데 (동진) 의희 연간에 왕 여전(진지왕), 송나라 원가 연간에 왕 여비(비유왕), 제나라 영명 연간에 왕 여태(동성왕) 모두가 중국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태(동성왕)을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몇 차례 고구려가 침략하였는데 (양나라)보통 2년에 그 왕 여융(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며 고하기를 잇달아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하였다.



所治城曰固麻, 謂邑曰?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 等附之. 言語衣服 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曰複衫袴曰?,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그 나라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군현과 같다. 22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종족이 나누어 다스렸다. 주변 소국으로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있어 부용한다. 언어와 의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 걸을 때 팔을 벌리지 않고 절을 할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로 관을 삼고 저고리를 복삼이라 하며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 말들이 섞여 있으니 이는 진한의 습속이 남은 것이다.



앞의 글 <4>와 <5>에서는 백제가 광주·전남지역 마한 제국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글 <4>에서는 문헌자료인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제시되었던 기존 4세기설을 부정하였고, 글 <5>에서는 고고자료인 성곽·분묘·금동관을 토대로 6세기설을 제시하였다.

고고자료는 문자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며 6세기설의 근거인 고고자료는 백제의 간접지배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독립된 세력이었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문헌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6세기설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전남지역 마한 제국이 6세기초까지 독립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문헌기록이 있다면 애초에 4세기설은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니 그와같은 지적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직접적인 문헌기록이 없어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고고자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백제 하남위례성은 ‘삼국사기’에 여러차례 나오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경기도 광주시 혹은 하남시, 서울 몽촌토성 등이 거론되다가 최근에야 서울 풍납토성으로 정착되고 있다.

직접적인 문헌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논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57년 신라를 필두로 기원전 37년 고구려, 기원전 18년 백제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

관련된 문헌기록이 없는 까닭이야 알기 어렵지만 문헌자료가 없다고 고고자료에 의한 새로운 해석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간접적이나마 이 문제와 관련된 문헌자료가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중국 양직공도는 이와같은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자기록이라 하겠다.

◇양직공도는 어떠한 자료인가

양직공도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그림이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봉건제에서 제후들이 천자에게 공납하였던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조공을 ‘직공’(職貢)이라 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그림을 ‘직공도’(職貢圖)라 하였다.

직공도에는 조공하는 나라의 사신 모습을 그리고 그 옆에 그 나라의 사정을 기록하였다. 기록 내용 가운데에는 나중에 만들어지게 되는 공식적인 역사서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것도 있다. 중국의 직공도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는데 남아있는 직공도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 양나라 직공도이다.

양직공도는 양 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만든 것인데 문헌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오다가 1960년에 남경박물원에서 확인되었다. 아쉽게도 원본이 아니라 1077년 북송때 모사되었고 일부만 남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원본에 충실한 것으로 인정되어 있다.



◇양직공도는 왜 중요한가

양직공도에는 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던 12개국 사신의 용모와 13개국 기사가 남아 있는데 521년에 무령왕이 파견한 백제사신과 189자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특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 내용은 백제의 기원, 고구려의 요동 점유와 백제의 요서 경략, 백제의 사신 파견 연혁,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 백제의 도성과 담로, 백제의 방소국, 백제의 언어·복식·풍속에 관한 것이다. 그 가운데 방소국 기사는 ‘양서’ ‘백제전’을 비롯한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방소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를 말하며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용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사라(신라)가 중앙에 있고 그 앞은 영남지역, 그 뒤는 호남지역 나라들이 나열되었다.

‘삼국사기’ 등 다른 기록을 보면 6세기초에 사라(신라)가 백제의 방소국이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 외에도 백제에 부용한다고 보기 어려운 가야 제국이 있으므로 부분적으로 백제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백제에 통합되지 않은 마한 제국들이 호남지역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 할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왜 양직공도를 참고하지 않았는가

이병도 박사의 369년설은 ‘일본서기’를 토대로 1959년에 처음 발표된 것이다. 양직공도가 확인된 것은 1960년이고 한국에는 1965년 이홍직 박사의 논문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1959년에는 이병도 박사가 양직공도를 알 수 없었다.

이홍직 박사는 방소국 가운데 일부가 6세기초까지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남아있었던 토착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지만 그 역사적 실체와 구체적인 위치를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미 통설로 자리잡고 있었던 이병도 박사의 견해를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다.



◇양직공도와 고고자료는 어떻게 부합하는가

백제 방소국으로 신라 뒤에 나열된 지미(止迷), 마련(麻漣), 상기문(上己文), 하침라(下枕羅) 가운데 상기문은 전북 남원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전남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고자료를 보면 백제는 남해안지역, 서해안지역, 영산강유역 순서로 마한제국을 통합하였는데 이 3개권은 각각 하침라, 마련, 지미가 중심국이면서 각각 고창·영광, 나주·영암, 고흥·여수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양직공도 백제 기사에는 담로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당시 백제 지방 행정조직은 22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종족이 나누어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글 <2>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고고자료를 통해 521년 당시 22담로였던 백제 지방 행정조직이 530년경 15개 마한 제국의 편입과 함께 37군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중국 대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에 소장된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 묘지석에 그의 조부가 마련 대장군을 지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바탕으로 당시 마련이 백제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양직공도 백제 방소국 기사는 간접적이나마 521년까지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에 통합되지 않은 마한 제국들이 상당수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며, 이것만으로도 기존 통설인 369년 근초고왕 병합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고고자료를 통해 제기된 6세기설이 문헌기록으로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인정되기 어렵다는 견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두 견해의 시기 차이가 160년에 달하므로 그 시기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 가운데 기존 4세기 병합설을 바탕으로 해석해 왔던 사건들에 대해 하나하나 재검토가 이루져야 할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