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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냥 국민이다
2020년 03월 03일(화) 00:00
이건근 조선대 민주평화연구원 사무국장
필자는 최근 옛 전남도청 복원, 5·18진상규명 선행조사, 광주민주화운동기념, 공영형 사립대학 실증연구, 민주 시민교육 등 여러 사업에 참여하면서 공통적인 사회적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근·현대 모든 사회가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약자가 다수일 때 ‘민주’ 개념이, 소수일 때는 ‘인권’이 논해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국내이든 해외이든 일정한 국가폭력이 자행되고 나서 대개 가해자는 ‘화해와 평화’를 강요하고, 그 시도에 대해서 피해자는 ‘진상규명’부터 요구했다. 그 와중에 양 진영은 각자의 시각과 이해 관계에 따라 ‘정의’를 서로 다르게 주장함으로써 정작 밝혀져야 할 사실보다 정쟁으로 번져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강제동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던 국가폭력의 사건들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진상규명에 있어서 5·18민주화운동(이하 5·18)만큼 정치적 다툼이 많고 격화된 적은 없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대부분 정당한 정권교체 가능 여부와 관련이 깊어서 대구2·28, 대전3·5, 3·15의거를 포함한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바로 무너뜨렸고, 부마항쟁은 제4공화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 경우들은 정권 말기에 발생한 것이었고, 5·18은 전두환과 노태우 신군부가 정권을 강탈한 직후에 발발해 광주시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럼에도 5·18은 1987년 6·29선언까지 7년 동안 광주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눈물과 피를 흘린 끝에 민주화 시대를 열어 지금까지 적어도 군대가 국민에게 총을 쏘는 일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5·18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정당한 민중항쟁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북한군 음모설 등 논쟁의 가치가 전혀 없는 이념 패러다임에 휩쓸려 마땅히 완료했어야 할 진상규명이 40년째 정체되고 있다. 그동안 국회, 검찰, 법원, 국방부에서 조사했다고 하지만, 핵심적인 사안으로써 가해자 측의 반성은 차치하고, 발포 명령자뿐만 아니라 선량한 시민을 폭도로 왜곡하려고 했던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면, 이 기간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2018)에서 중앙정보부 최영찬 과장이 “요즘 세상에 37년 전 일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 것처럼, 일부 인사들은 5·18 진상규명을 해묵은 과제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같은 작품에서 희수가 “잊어도 될 범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민주화의 밀알이 된 5·18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절대로 중단할 수 없다.

사실 5·18 진상규명은 국민적 지지가 조금만 더 있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지역에 따라 양상과 정도가 다를지라도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도시에서 그렇게 극악무도한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하면”하고 자문해보면, 이 말은 명백해질 것이다. 그렇다. 5·18 민중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선량한 보통의 시민이었다. 물가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 방안 또는 화장실에 가만히 있던 노인들, 주민의 안전을 챙기던 이장, 아들을 찾아 나선 아낙네, 간난이 아버지, 의료자원봉사 여학생들의 희생을 어떠한 색깔론으로 해명할 수 없다. 그들은 부유하거나, 많이 배우지도 않았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순박한 촌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계의 양심은 5·18 민중의 저항을 추앙해 9년 전에 그 흔적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했고, 동남아시아, 중국, 아랍계, 그리고 최근에는 홍콩의 민주화운동에까지 영향을 줬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에서 황태술은 “조심해서 가쇼. 가셔가지고. …저놈들 거짓말을 속 시원하게 알려주쇼”라고 말했고, 영화 ‘꽃잎’(1996)에서 소녀는 “귀 막으면 안 돼. 그러면 그 말이 가루가 돼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거여”라고 울었다. 그리고 영화 ‘박하사탕’(1999)에서 계엄군 출신 김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비명을 질렀고,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 박신애는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지금 시내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사정했다. 이는 모두 이 시대 5·18 진상규명의 준엄한 사명을 말함이다.

신군부의 입장을 백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래서, 정변을 일으킨 세력으로서 광주시민을 학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떡하나! 그들은 배운 대로만 했더이다. 쿠데타를, 좌파·우파 놀음을, 그리고 도대체 보지도 듣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린 무정함을. 5·18 진상규명의 역사 40돌, 불혹(不惑)의 다짐과 성숙함으로 이 상황을 녹여보는 것이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