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호남 학자 송암 기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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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학자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 1647)은 문장가로서도 천하에 이름이 높았다. 그는 그의 문집 ‘잡저’(雜著)에서 “호남의 상도(上道)에는 일재(一齋)가 있었고 하도(下道)에는 고봉(高峰)이 있었으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만이 일재를 이었을 뿐 학문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만 한 학자가 호남에서 이어져 오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긴 글을 남긴 것이다. 일재나 고봉과 동시대에 국가를 대표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있긴 했으나 51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16세기 후반에는 일재와 고봉만이 실존했던 까닭에 하서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재 김천일은 학문도 높았지만, 임진왜란에 의병대장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도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항의 문하에는 김천일만 있었다고 거론했지만, 학문으로는 일재에 버금가고 또 의병장으로도 활동했던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1530∼1593)이 있다. 금강은 일재와 하서의 두 분 문하를 출입한 당대의 학자였다. 기대승의 5촌 조카로 기씨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 그의 현손(玄孫) 송암(松巖) 기정익 (奇挻翼,1627∼1690)에게 학문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기효간이었다. 기대승은 광주에서 살았고 기효간은 장성에서 살아 광주기씨, 장성기씨의 호칭이 있는데 기씨 가문은 호남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학자가 많은 명문 집안으로 알려졌다. 기정익의 현손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고 그의 손자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니 그들의 뛰어난 명성은 비길 데 없이 높았다.
송암(松巖) 기정익은 당대의 학자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송시열 학단의 수많은 친구와 학문을 토론하고 경학 연구에 생애를 바쳤었다. 동문의 친구로는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수없이 많은 편지를 통해 학문 토론을 이어 갔으나, 뒷날 송시열과 윤증과의 갈등이 커지자 윤증보다는 송시열의 입장을 지지했던 사람이 기정익이었다. 당시 17세기의 호남에는 하서·고봉과 같은 대학자는 많지 않았지만, 백촌 유세익·우헌 박상현(1629~1693) 등 대단한 학자들이 광주에서 활동하였다. 기정익은 이들과 막역한 사이로 호남의 유학 발달에 기둥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우헌 박상현의 아들이 당대를 대표하던 학자 손재 박광일(1655~1723)이었으니 손재는 기정익을 스승으로 모시며 많은 학문 토론을 계속했었다.
특히 기정익이 살아가던 시대는 그야말로 학문이라면 성리학(性理學)이어서 기정익은 송시열·윤증·박상현·박광일 등과 끝없이 성리학 논쟁을 벌이는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었다. 뒤에 기정익을 이어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반열에 오른 박광일은 기정익의 행장(行狀)을 지어 그의 학문과 생애를 유감없이 후세에 전해 주고 있다. 행장에 의하면 기정익은 경학(經學)과 성리학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경세학(經世學)에도 높은 업적을 남겼다면서, ‘정전의’(井田議)라는 논문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송암문집’에는 ‘사의정전’(私議井田) 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국가 경제의 주요 분야인 토지 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잘 밝혀져 있다.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국가의 정치와 경제에 마음을 기울이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그런 데서 알게 된다.
박광일은 기정익의 학문과 사상을 평가하면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의 인물이나 역량이 탁월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기정익은 ‘호남일인’(湖南第一)이니 ‘호남제일인물’(湖南第一人物)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정익의 학문·사상·인물의 영향으로 후손에서 노사 기정진이 나왔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선 역시 혈맥·학맥의 영향 아래 뛰어난 학자나 사상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정조 때에 대제학에 좌의정을 역임한 당대의 학자 몽오 김종수(1728~1799)는 기정익의 묘표(墓表)를 지어 16세기의 찬란하던 호남 유학계에 끊어져 가던 학문을 자력으로 일으킨 공로를 크게 찬양하고 있다. “호남은 옛날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기정익의 시대에는 거의 끊어지던 때인데, 공께서 자력으로 끊어지던 학문을 이었다.”(湖南古以文獻名 而及公之時 則幾乎絶矣 乃公起於絶學之餘 自力爲學) 이는 17세기 호남 유학이 기정익의 공으로 전통을 이어 오게 되었다는 칭송이었다. 그렇다. 송암 기정익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그가 17세기 호남의 대표적 학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특히 기정익이 살아가던 시대는 그야말로 학문이라면 성리학(性理學)이어서 기정익은 송시열·윤증·박상현·박광일 등과 끝없이 성리학 논쟁을 벌이는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었다. 뒤에 기정익을 이어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반열에 오른 박광일은 기정익의 행장(行狀)을 지어 그의 학문과 생애를 유감없이 후세에 전해 주고 있다. 행장에 의하면 기정익은 경학(經學)과 성리학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경세학(經世學)에도 높은 업적을 남겼다면서, ‘정전의’(井田議)라는 논문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송암문집’에는 ‘사의정전’(私議井田) 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국가 경제의 주요 분야인 토지 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잘 밝혀져 있다.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국가의 정치와 경제에 마음을 기울이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그런 데서 알게 된다.
박광일은 기정익의 학문과 사상을 평가하면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의 인물이나 역량이 탁월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기정익은 ‘호남일인’(湖南第一)이니 ‘호남제일인물’(湖南第一人物)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정익의 학문·사상·인물의 영향으로 후손에서 노사 기정진이 나왔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선 역시 혈맥·학맥의 영향 아래 뛰어난 학자나 사상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정조 때에 대제학에 좌의정을 역임한 당대의 학자 몽오 김종수(1728~1799)는 기정익의 묘표(墓表)를 지어 16세기의 찬란하던 호남 유학계에 끊어져 가던 학문을 자력으로 일으킨 공로를 크게 찬양하고 있다. “호남은 옛날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기정익의 시대에는 거의 끊어지던 때인데, 공께서 자력으로 끊어지던 학문을 이었다.”(湖南古以文獻名 而及公之時 則幾乎絶矣 乃公起於絶學之餘 自力爲學) 이는 17세기 호남 유학이 기정익의 공으로 전통을 이어 오게 되었다는 칭송이었다. 그렇다. 송암 기정익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그가 17세기 호남의 대표적 학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