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전 임진왜란 호남 의병사 연구 기폭제
장흥 출신 의병장 갈옹 문홍개 문집 발굴
국난 이후 초야 은거하며 일대기 회고 유고서첩
이치 전투 참전·이괄의 난 진압 등 역할 기록
국난 이후 초야 은거하며 일대기 회고 유고서첩
이치 전투 참전·이괄의 난 진압 등 역할 기록
![]() 갈옹 문홍개 문집 |
최근에 손용선 고문서 수집가에 의해 발굴된 장흥 출신 갈옹(葛翁) 문홍개 문집은 호남의병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영남의병사는 어느 정도 체계화가 돼 있는 반면, 호남의병사는 몇 명의 의병 외에는 조명이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갈옹의 문집 발굴이 400년 전 임란 당시 호남의병사를 다각도로 연구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문집 해제를 한 호남의병연구소 노기욱 소장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도 갈옹이라는 의병장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며 “그의 부친 문위세를 비롯한 가문이 알려지면서 갈옹의 존재가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노 소장은 특히 문위세-문홍개 집안의 충의는 제봉 고경명 집안 못지않게 대단했다고 강조한다. 문위세 뿐 아니라 고모부인 박광전 또한 임진왜란 때 67세였던 노구를 이끌고 아들 박근효과 함께 의병에 참가했다.
이번 문집은 갈옹이 1629년 기사년에 초야에 은거하며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소회를 피력한 유고서첩이다. 누란의 위기를 맞아 온 가문이 목숨을 내던져 나라를 위해 창의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갈옹이 참전한 이치 전투에 대한 내용도 가늠할 수 있다. 호남의병 활동상을 책으로 묶어내고 있는 양성현 작가의 ‘갈옹 문홍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저지했다.”
또한 1597년(선조30)에 왜적이 다시 침략 했을 때, 문위세와 문홍개 부자도 참전한다. 양 작가에 따르면 “문위세는 당시 용담 현령으로 있으면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고 이를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홍개는 형 문영개와 함께 죽기를 각오한 장사 수백 인을 이끌고 사방의 경계로 나누어 나가서 힘을 다해 적을 차단했다”고 강조했다.
갈옹의 부친 문위세는 임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조달 등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을 무찔렀으며 1600년 파주목사에 임명됐다. 이후 병조참판에 추증됐으며 현재 장흥군 강성서원에 제향됐다.
이같은 문위세-문홍개 가문의 활약상 은 ‘일성록’(정조 23년, 1798년 9월 1일(신유))에도 나온다.
“장흥의 유학 임오원 등의 상언에 ‘본도’의 고(故) 목사 문위세, 그의 아들 직장(直長) 문영개와 문홍개 삼부자는 충선공 문익점의 후손입니다.(중략) 임진란 때에 그의 제서 박광전, 벗 임계영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병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으는 한편, 열읍에 격문을 전달하여 원근의 병사를 불러 모으도록 효유(曉諭·잘알아듣도록 타이름)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여러 곳의 의병과 함께 기세를 모아 마침내 금산과 성산의 왜적으로 하여금 예봉을 꺾고 스스로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이후 문홍개는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에도 역할을 했다. 양 작가의 ‘갈옹 문홍개’에는 당시 여러 선비들과 병사를 모집해 군량을 모아 신속하게 임금을 보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공을 인정받아 군자감 직장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문홍개는 1638년 4월 24일 향년 68세로 타개한다.
한편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한국녹차박물관, 여수시립박물관 등 30년에 걸쳐 고문서 감정을 했던 노기욱 박사는 손용선 고문서 수집가, 양성현 호남의병사 작가와 함께 이번 갈옹 문집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해 검증을 받을 예정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지금까지 영남의병사는 어느 정도 체계화가 돼 있는 반면, 호남의병사는 몇 명의 의병 외에는 조명이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갈옹의 문집 발굴이 400년 전 임란 당시 호남의병사를 다각도로 연구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 소장은 특히 문위세-문홍개 집안의 충의는 제봉 고경명 집안 못지않게 대단했다고 강조한다. 문위세 뿐 아니라 고모부인 박광전 또한 임진왜란 때 67세였던 노구를 이끌고 아들 박근효과 함께 의병에 참가했다.
이번 문집은 갈옹이 1629년 기사년에 초야에 은거하며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소회를 피력한 유고서첩이다. 누란의 위기를 맞아 온 가문이 목숨을 내던져 나라를 위해 창의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저지했다.”
또한 1597년(선조30)에 왜적이 다시 침략 했을 때, 문위세와 문홍개 부자도 참전한다. 양 작가에 따르면 “문위세는 당시 용담 현령으로 있으면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고 이를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홍개는 형 문영개와 함께 죽기를 각오한 장사 수백 인을 이끌고 사방의 경계로 나누어 나가서 힘을 다해 적을 차단했다”고 강조했다.
갈옹의 부친 문위세는 임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조달 등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을 무찔렀으며 1600년 파주목사에 임명됐다. 이후 병조참판에 추증됐으며 현재 장흥군 강성서원에 제향됐다.
이같은 문위세-문홍개 가문의 활약상 은 ‘일성록’(정조 23년, 1798년 9월 1일(신유))에도 나온다.
“장흥의 유학 임오원 등의 상언에 ‘본도’의 고(故) 목사 문위세, 그의 아들 직장(直長) 문영개와 문홍개 삼부자는 충선공 문익점의 후손입니다.(중략) 임진란 때에 그의 제서 박광전, 벗 임계영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병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으는 한편, 열읍에 격문을 전달하여 원근의 병사를 불러 모으도록 효유(曉諭·잘알아듣도록 타이름)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여러 곳의 의병과 함께 기세를 모아 마침내 금산과 성산의 왜적으로 하여금 예봉을 꺾고 스스로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이후 문홍개는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에도 역할을 했다. 양 작가의 ‘갈옹 문홍개’에는 당시 여러 선비들과 병사를 모집해 군량을 모아 신속하게 임금을 보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공을 인정받아 군자감 직장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문홍개는 1638년 4월 24일 향년 68세로 타개한다.
한편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한국녹차박물관, 여수시립박물관 등 30년에 걸쳐 고문서 감정을 했던 노기욱 박사는 손용선 고문서 수집가, 양성현 호남의병사 작가와 함께 이번 갈옹 문집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해 검증을 받을 예정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