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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로만자로의 ‘그’ 표범은 어떻게 되었을까?
2020년 01월 03일(금) 00:00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가서 보면 별 것 아닌 것을 그때는 왜 그리 가고 싶었는지….’ 노년을 바라보는 한 신사의 넋두리였다. 드라마에서 본 이 대사가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래도 행복한 축에 속한다.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그저 부러운 넋두리일 뿐이다. 가보지도 못한 이들은 대개 이렇다. 좋은 직장에 맘 편하게 다니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 여자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먹고 사는 걱정일랑 하지 않고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바라는 곳에 가보지도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가보겠다고 생각만 하고 발도 내디뎌 보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결심과 바람이 또 얼마나 많은지. 처음의 열정이 사그라져서, 혹은 거기 가야 할 절실함이 식어 돌린 발걸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저기’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느낌이 드는 것과 ‘여기’가 싫어서 여기가 아닌 다른 ‘저기’ 중의 한 곳으로 가는 것은 분명 다르다. 킬로만자로의 표범은 21세기가 자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저기’ 21세기로 가노라고 말한다. 눈 덮인 킬로만자로에서 홀로 하얗게 얼어 죽어가고 있지만, 바로 ‘21세기’가 자신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고독한 정상에서 홀로 죽을 수 없는 것이 ‘그’ 표범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왜 홀로 정상까지 올라가 거기서 얼어 죽어 가고 있는지, ‘21세기’는 왜 그토록 그를 간절히 원하는지 눈 덮인 정상에 홀로 서보지 못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고독과 싸우며 홀로 정상에 섰을 때만 ‘21세기’가 눈에 들어오리라.

노년의 신사는 눈 덮인 정상에서 열대의 평원을 바라보다가, ‘내가 왜 여길 올라왔던가…’ 혼자 넋두리하고, 표범은 ‘21세기’가 원하니 여기 올라와 이렇게 있노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 ‘저기’가 자신을 간절히 원하도록 하려면 먼저 내가 그것을 보아야 하고,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한다고.

그러나 계속 같은 의문이 생각의 꼬리를 붙잡는다. 왜 원해야 하나? 그냥 그렇게 ‘21세기’가 있는지도, 눈 덮인 정상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평원의 한 마리 짐승으로 살다 죽는 것은 왜 안 된단 말인가? 어쩌면 존재함의 숙명(宿命)에 대한 반역일지도 모를 이런 의문이 부지불식간에 불쑥 떠오른다.

이 의문의 밑바닥에는 지겹고 단조롭지만 한편으론 편안하고 안정된 현실에 대한 애증(愛憎)이 자리 잡고 있다. 현실의 단조로움과 권태는 짜증과 증오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편안함과 안정됨에 대한 애착은 증오를 녹일 만큼 강하다.

그래서 현실은 항상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갈등에 적당히 지칠 즈음 눈앞에 ‘거기’가 드러나 보이고 ‘거기’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현실의 모든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직 ‘거기’에 가지도 않았고, 가는 도중도 아니며, 현실에서 바뀐 것은 전혀 없다.

산 중턱을 헤매다 굶어 죽은 하이에나에게 의문은 치열하지 못했고 능력은 미흡했다. 신은 인간에게 의문을 던질 자유를 주었지만 그 의문을 풀 능력까지 모두 준 것은 아니다. 신은 인간에게 ‘저기’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었지만, ‘저기’에 갈 수 있는 능력까지 주지는 않았다. 욕망은 자유지만 현실은 능력을 원한다. 능력은 순전히 인간의 몫이다.

어떤 이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얼렁뚱땅 보낸 지난 1년을 후회한다. 어떤 이는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오는 것이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난해 하지 못한 것보다 했던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 가슴 뿌듯해한다.

이 세상 모든 것 힘들이지 않고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길은 두 가지 뿐이다. 힘들여 하든지, 아니면 ‘저기’를 원하지 않든지. 힘들여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나저나 킬로만자로의 표범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21세기’에 들어선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 표범은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