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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魂<22> <제3부> 전라도, 문화예술 꽃피우다 ⑤ 조선왕조실록
생생한 조선시대 역사 ‘타임캡슐’이 열리다
조선 세운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 역사 기록…1893권 888책
국보·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임진왜란 때 병화 위기 처했지만
물재 안의·한계 손홍록 두 선비
전주사고서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내
2019년 11월 08일(금) 04:50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태인현 선비 안의와 손홍록 선생이 전주사고에서 실록을, 경기전에서 태조 어진을 빼내어 내장산으로 옮기는 모습을 그린 실록 이안도.
태조실록




임계기사




임계기사








‘조선왕조실록’은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의 역사가 ‘편년체’(編年體=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기록하는 형식)로 기록돼 있다. 국보(151호)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면서 무궁무진한 문화 콘텐츠의 보고(寶庫)다. 전주사고(史庫)에 보관돼 있던 실록은 임진왜란 때 자칫 병화(兵火)로 불타버릴 위기에 처했지만 전라도 태인현(현재 정읍시 칠보면) 출신 물재 안의와 한계 손홍록 등 두 선비의 헌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선 태조~철종 472년 역사 편년체로 기록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1408년(태종 8년) 음력 5월 24일 승하(昇遐)한다. 태종은 이듬해 8월 하윤에게 ‘태조실록’을 편수(編修=여러 자료를 모아서 책을 만듦)하도록 명한다. 하지만 태조와 함께 활동한 구신(舊臣)들이 생존해 있는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 등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잇따른다.

“같은 때의 사람이 같은 때의 일을 찬수하면 어느 누가 갖춰 쓰고 곧게 써서 목전(目前)의 화를 취하려 하겠습니까?”(예조판서 이응)

1410년 음력 1월 초순, 비로소 실록편찬이 시작된다. 이때 사관(史官)은 두 사람만 참여하도록 제한하자 한 사관이 하윤에게 말한다.

“우리들은 직필(直筆)을 잡고 시사(時事)를 기록하는 자입니다. 하물며 지금 수찬하는 것이 고례(古例)에 의하지 않고 당대에 수찬하며, 또 사관으로 하여금 다 참여도 못하게 하니, 두렵건대 후인이 더욱 의심할까 합니다.”(‘태조실록’ 19권 1월 11일자)

이러한 치열한 논쟁 속에서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원칙이 정립됐다. 사관은 항상 임금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꼼꼼하게, 소신껏 기록했다. 선대왕(先大王)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임시로 실록청을 만들어 실록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임금일지라도 선대왕의 기초자료인 사초(史草)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고, 사관 이외에는 실록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사화’(史禍)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의 역사가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실록 속에 연월일 날짜순(편년체)으로 고스란히 담겼다.(고종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간섭아래 편찬돼 실록의 가치를 잃었다.)

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다. 이를 통해 21세기에도 시간여행을 하듯 조선시대의 정치·경제·문화·사회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시사만화가 출신인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 경우 처럼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창작할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한다.



◇2001년 발굴된 ‘임계기사’ 새로운 사실 밝혀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고(史庫)가 각 지역에 차례로 설치됐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내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忠州)사고가 있었다. 세종 때에 경상도 성주(星州)와 태조 어진(御眞)을 모시는 전주 경기전내에 실록각이 추가로 설치됐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 3곳은 병화(兵火)로 모두 불타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서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실록만 전쟁 통에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는 경기전 어진각 참봉 오희길이 주도해 실록과 어진을 정읍 내장산으로 피난시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때 정읍 태인현 선비 물재(勿齋) 안의(安義·1529~1596)와 한계(寒溪) 손홍록(孫弘祿·1537~1610)은 실록을 옮기는 관(官)의 기획과 실행에 ‘단순한 심부름’ 정도를 했다는 정도로 인식됐다.

그런데 2001년 초에 정읍 탐진 안씨 문중 종손(宗孫)에게 가보로 대대로 전해져 오던 ‘임계기사’(壬癸記事)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팩트’(fact)가 밝혀졌다. 안의 선생이 임진년(1592년)과 계사년(1593년) 두해 동안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수직(守直·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킴)한 상황을 기록한 일지였다. 안의가 홀로 수직한 날은 174일, 손홍록이 혼자 수직한 날은 143일, 두 사람이 함께 수직한 날은 66일로 모두 383일 동안 혼자 또는 함께 실록과 어진을 지켰다고 날짜별로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언론인이자 향토사 연구자인 이용찬(55) 정읍학연구회 사무국장(전북대 민속학 박사과정)이 탐진 안씨 방계 후손인 안성렬(당시 태산선비문화관 관장) 씨를 만나 그동안 학계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임계기사’를 우연하게 발굴했다. 그는 임계기사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792년 태인현 무성서원 간행), ‘이재유고’(1822년 이재 황윤석 간행) 등을 낱낱이 살펴보면서 역사의 퍼즐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갔다.

연구결과 임진왜란 후 230년 뒤에 쓰여진 ‘이재유고’에 오희길의 공적으로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당대에 기록된 ‘임계기사’는 전주 경기전 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어진각 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移安=다른곳으로 옮겨 모심)하고, 지킨 것은 정읍 태인현 선비 안의와 손홍록임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만인 5월 2일 한양에 무혈 입성한다. 6월 5일 용인전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등 삼도연합군 8만여명의 군사들이 왜군에게 참패한다.

이런 급박한 전황속에서 전라도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를 맞았다. 춘추관과 충주, 성주사고는 이미 불타올라 잿더미로 변했다.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기 전에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御眞)과 전주사고 실록을 보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두 정읍선비에 의해 ‘신화’가 만들어진다.



◇일재 이항과 제자들의 ‘실천적 선비정신’

안의와 손홍록은 나이차가 있지만 태인현 대유학자인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受學)한 제자였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건재(健齋) 김천일과 오봉(鰲峰) 김제민, 도탄(桃灘) 변사정 등 많은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안의는 손홍록과 함께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을 맡아 몽진을 떠난 선조가 임시로 머무르는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쌀 300석과 포목 등 여러 물품을 수송하고, 나머지는 의병진영 3곳에 보냈다.

두 선비는 용인전투에서 대패하고 음력 6월 21일 전주로 돌아온 전라도 감사 이광의 재가를 받아 이튿날 전주사고에 보관중이던 실록을 30여 마리의 우마(牛馬)에 싣고 정읍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으로 이안한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태조실록~예종실록을 비롯해 ‘고려사’ 등 각종 서적 1322책이 60개 상자(실록 47궤, 기타 13궤)에 보관되고 있었다.

어진은 7월 1일에야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겨져 봉안된다. 얼마후 실록과 어진은 더욱 험준한 비래암(飛來庵)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임계기사’에 기록된 것처럼 두 선비는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실록을 지킨다.

이듬해인 1593년 음력 7월 9일, 선조의 명에 따라 실록과 어진은 정읍현으로 옮겨졌고, 열흘 뒤인 19일 충청도 아산에서 충청감사 이산보에게 인계된다(2차 피난). 두 선비는 이안에 필요한 말과 식량, 비용을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이후 1596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자(정유재란) 아산에서 평안도 영변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기는 ‘3차 피난’은 손홍록이 주도했다.(안의는 1596년 9월 6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두 선비가 국난(國難)중에 개인재산을 털어 실록을 옮기고, 지킨 까닭은 무엇일까? 또 자신들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았고, 벼슬길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용찬 정읍학연구회 사무국장은 최근 학술저널 ‘국어문학’(국어문학회 발행)에 발표한 논문 ‘물재 안의의 가계(家系)와 임계기사 연구’에서 “예로부터 태인지역에서는 선비들이 평시에 관직을 마다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전념했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분연히 일어서 전장에 나섰다는 점에서 선대의 선비정신이 후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정읍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강조한다.

이 사무국장은 안의와 손홍록 등 정읍의 선비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의 ‘문화재 지킴이’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안의와 손홍록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에 문화유산(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다. 일재의 문하생들도 갹출하듯 돈을 모아 두 선비일을 도왔다. 어떤 의미에서 안의와 손홍록 선생이 먼저 보여줬던 선험적 행적이 결국은 ‘문화재 지킴이’의 모델이다. 지금의 ‘문화재 지킴이’는 그분들이 시대를 뛰어넘어서 앞서 실천하셨던 것을 제도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문화재청과 (사)한국문화재지킴이 단체연합회는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전란의 위기에서 보호하고 후세까지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한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제정했다. 지난해 6월 경복궁 수정전에서 선포식을 가졌고, 올해 6월에 내장산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