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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호남 시무독도
2019년 11월 06일(수) 04:50
울릉도·독도 개척사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조정은 왜구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우게 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추진했다. 섬 주민을 뭍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울릉도도 조선 전기 이후 빈 섬이 됐다. 하지만 거문도·초도 등 여수와 고흥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뱃사람들은 해마다 춘삼월이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울릉도로 배를 띄웠다. 울릉도와 독도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을 말려 가을철이면 울릉도 목재로 만든 배를 타고 돌아와 서해안 포구까지 올라가 팔곤 했다.

당시 일본 어부들도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면서 전복과 물개를 잡았는데 조선 어부들과 마찰을 빚었다. 조선 숙종 때 독도 영유권을 두고 일본과 처음으로 분쟁이 일자 안용복은 두 차례(1693,1696년) 일본을 방문해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문서를 받아 냈는데 이때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전라도 사람들과 동행했다.

조선 말기에는 독도에 전라도 색채가 더 짙어졌다. 1882년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울릉도에 사는 주민 140명 중 82.1%인 115명이 거문도와 낙안 등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전라도 사람들이 주민의 대다수이다 보니 1890년에는 거문도 출신 오성일이 울릉도 도감(군수)에 임명됐다.

독도라는 이름도 전라도에서 유래됐다. 1900년 고종 황제는 칙령을 내려 석도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울릉군의 부속 도서로 공식 고시했는데 석도는 전라도 사투리 독섬에서 비롯됐다. 1947년 울릉도·독도 조사 대원으로 참가했던 방종현 서울대 교수는 돌이 많아 전라도 말로 독섬으로 불렸고 그 음을 따 독도(獨島)로 표기했다고 설명했다.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에 독도라는 섬이 있다. 거금도 맞은편에 있는 돌섬인데 이곳에서 호남대생들이 독도 탐방단 발대식을 갖고 6일까지 4박5일 동안 구한말 전라도 사람들의 울릉도·독도 개척 코스를 답사한다. 이순신 장군은 일찍이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의 가슴에는 아마 ‘약무호남 시무독도’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장필수 전남본부장 bun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