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대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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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 관람을 위해 운암동 문화예술회관에 갔다. 홀 중앙의 티켓박스로 가서 예매해 둔 입장권을 찾았다. 점점 나빠지는 시력 탓에 1층 앞쪽 자리를 선호하는데, 영화관에서처럼 프라임존에서 비껴난 앞쪽 좌석이 오히려 저렴하다. 세 단계로 나뉜 티켓 가격에서 제일 비싼 R석이 3만 원, 중간인 S석이 2만 원, 가장 싼 A석이 1만 원이다. 이런저런 할인 혜택을 적용하면 A석의 경우는 영화 한 편 관람하는 가격에도 미치지 않는다.
서곡 없이 곧바로 협주곡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바이올린 협연자인 윤소영의 연주를 보고 듣는 것이 이날 연주회 감상의 개인적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작은 체구에도 당당한 매너로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연주력을 과시하는 그녀의 모습이 흡사 여성 로커처럼 느껴진다. 윤소영과 같은 세계 정상급 솔로이스트와 광주시향 정도 되는 실력 있는 대규모 관현악단(이날 연주자만 총 70명이 넘었다)의 실연을 듣기 위해 최고 3만 원 이내의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은 광주 시민으로서 누리는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대중음악계의 유명 가수나 연주가들이 광주에서 콘서트를 열어도 티켓 가격이 십여 만 원을 훌쩍 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이날 연주된 브람스의 낭만적 작품들은 인지도 면에서나 청취의 난이도 면에서나 아주 ‘대중적’이었다. 우리가 보통 ‘대중음악’과 구별하여 ‘클래식’이라고 일컫는 서양 근대음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대중음악이다. 클래식은 서양의 절대왕정 체제에서 시민사회로의 전환기에 아마추어 연주 문화의 확대와 악보 시장의 성장, 입장권을 판매하는 대중음악회(public concerts)의 확산 등과 같은 음악의 상업화와 대중화를 배경으로 성장해 온 음악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대중음악’과 구별되는 일종의 ‘고급음악’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이후로 최근의 일이다. 이와 같은 ‘고급-저급’의 음악적 분열은 사실상 근대 이전의 신분사회, 봉건적 구체제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하버마스가 ‘공공성의 재봉건화’라고 비판했던 이러한 분열 상황에서 벗어나 클래식의 초심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클래식 스스로 속물화된 ‘고급음악’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대중적 소통의 다양한 창구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음악에서 대중성과 공공성(양자는 사실상 동의어다) 그 자체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대중음악’으로 지칭되는 음악들은 과연 대중성이 있을까? 오늘날 ‘대중음악’에서 대중성이란 중앙 미디어 권력과 독점적 대형 기획사들에 힘입어 몸값을 키운 가수들이 전국 방방곡곡 축제의 현장에서 행사하는 ‘대중 동원력’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깊어 가는 광주의 가을, 주말마다 확성기로 뿜어져 나오는 도시 축제의 다양한 소리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그 소리 풍경에는 ‘바람직하고 조화로운 소리’에 대한 누군가의 요구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적 공공성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그저 참여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대중 동원의 선전 기능에 머무는 것인지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음악의 공공성을 고려함에 있어서 교향악 양식은 간과할 수 없는 모델이다. 서양 근대의 산물인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유지해 왔듯이, 이 서양의 근대적 음악 양식 또한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자기 선언’이라는 함의를 담아 왔기 때문이다.
‘시향’(市響)은 한자어 조합을 통해서도 ‘도시의 소리 풍경’을 은유한다. ‘광주시향’은 어떤 다른 ‘광주의 소리 풍경’을 은유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11월 정기 연주회에서 광주시향은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한다고 한다. 말러의 교향곡은 악기 편성의 규모와 음량 면에서 이미 ‘대중적’이다. 그것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거나 록밴드의 헤비메탈 사운드에 빠져드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청중에게 안겨 준다. 1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서 확성기도 없이 들려주는 강렬한 어쿠스틱 사운드는 또 다른 도시의 소리 풍경을 펼쳐 보일 것이다. ‘대중 동원력’이 아닌 음악의 ‘대중성’은 그와 같은 소리 풍경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버마스가 ‘공공성의 재봉건화’라고 비판했던 이러한 분열 상황에서 벗어나 클래식의 초심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클래식 스스로 속물화된 ‘고급음악’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대중적 소통의 다양한 창구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음악에서 대중성과 공공성(양자는 사실상 동의어다) 그 자체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대중음악’으로 지칭되는 음악들은 과연 대중성이 있을까? 오늘날 ‘대중음악’에서 대중성이란 중앙 미디어 권력과 독점적 대형 기획사들에 힘입어 몸값을 키운 가수들이 전국 방방곡곡 축제의 현장에서 행사하는 ‘대중 동원력’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깊어 가는 광주의 가을, 주말마다 확성기로 뿜어져 나오는 도시 축제의 다양한 소리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그 소리 풍경에는 ‘바람직하고 조화로운 소리’에 대한 누군가의 요구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적 공공성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그저 참여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대중 동원의 선전 기능에 머무는 것인지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음악의 공공성을 고려함에 있어서 교향악 양식은 간과할 수 없는 모델이다. 서양 근대의 산물인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유지해 왔듯이, 이 서양의 근대적 음악 양식 또한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자기 선언’이라는 함의를 담아 왔기 때문이다.
‘시향’(市響)은 한자어 조합을 통해서도 ‘도시의 소리 풍경’을 은유한다. ‘광주시향’은 어떤 다른 ‘광주의 소리 풍경’을 은유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11월 정기 연주회에서 광주시향은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한다고 한다. 말러의 교향곡은 악기 편성의 규모와 음량 면에서 이미 ‘대중적’이다. 그것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거나 록밴드의 헤비메탈 사운드에 빠져드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청중에게 안겨 준다. 1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서 확성기도 없이 들려주는 강렬한 어쿠스틱 사운드는 또 다른 도시의 소리 풍경을 펼쳐 보일 것이다. ‘대중 동원력’이 아닌 음악의 ‘대중성’은 그와 같은 소리 풍경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