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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魂<18> <제3부> 전라도, 문화예술 꽃피우다 ① 천하제일 고려청자
고려 비색이 만들어낸 청자, 강진서 꽃피우다
무늬·조형미·비색 등 기법 다양…고려 공예문화 정수 평가
초기엔 개경을 중심으로 제작…지배층이 사용한 생활용품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강진으로…새로운 양식·기술로 발전
환경·기술·자연 조건 최적 요지만 188곳…세계유산 추진
2019년 10월 14일(월) 04:50
청자상감모란국화연화문과형주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청자합




청자합




국가사적 제68호로 지정된 ‘강진 고려청자요지’ 중 사당리 요지 발굴조사 현장. /강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의 한 도공이 화목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다.








“선(線)은 / 가냘픈 푸른 선은 / 아리따웁게 구을러 / 보살같이 아담하고 / 날씬한 어깨여 / … / 빛깔 오호! 빛깔 /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 … ”

시인 월탄 박종화는 ‘청자부(靑磁賦)’에서 천년 묵은 고려청자의 맵시 있는 선을 보살의 어깨에, 신비로운 비췻빛을 가을 하늘에 비유해 찬미했다.

고려 문신 백운거사 이규보는 “나무를 베어 남녘 산이 벗겨지고 / 불을 지펴 연기가 해를 가리웠지 / 푸른색 자기 술잔을 구워내 / 열에서 골라 하나를 얻었네 / 선명하게 푸른 옥 빛나리 / 몇 번이나 짙은 연기 속에 묻혔었나 / 영롱하기 맑은 물을 닮고 / 단단하기 바위와 맞먹네 /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 하늘의 조화를 빌었나 보구려 / 가늘게 꽃무늬를 점 찍었는데 / 묘하게 정성스런 그림 같구려 / 푸르게 빛나는 옥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 한 번 보는 내 눈조차 맑아지는 것 같아라”라며 청자 술잔을 빚은 장인의 솜씨를 ‘하늘의 조화’라고 감탄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더욱 신비로웠을 게다. ‘도자기 나라’ 중국의 태평노인은 ‘수중금(袖中錦)’에서 “고려비색이 천하제일”이라 극찬했고, 일본인 우시야마 쇼오죠는 “누가 나에게 신(神)에게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고려청자를 통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라며 고려청자를 찬양했다.



◇흙과 불, 그리고 사람의 조화

청자는 2세기경 중국에서 탄생했다. 이후 한반도에 전해졌고, 자체 생산한 시기는 9~10세기 나말여초 시대로 추정한다. 중국과 한국의 청자 생산 시기가 700~800년의 텀이 있다. 그만큼 청자 제작 기술은 최첨단 극비였다. 1300도 이상 고온을 유지할 수 있는 가마, 장인의 불조절 노하우, 유약 조제, 바탕이 되는 좋은 흙(태토)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청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가마들에서 제작됐다. 벽돌로 만든 중국식 가마였다. 그러다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장인들의 기술 축적이 이뤄지면서 청자는 크게 발전했고, 11세기들어 가마는 진흙을 쌓아 만든 소형의 흙가마로 진화했다. 12세기 세련된 도공들의 솜씨는 고려 특유의 비색(翡色)을 완성시켜 중국의 비색(秘色)을 능가했으며, 그 모양과 색에서도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 절정기를 맞았다.

주요 고객은 왕실과 귀족, 관청, 사찰이었다. 수요에 따라 공급이 이뤄지는 법, 청자는 고려 지배층의 또 다른 얼굴이다. 향유층의 미적 수준, 취향과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까닭이다.

명품 고려청자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다채로운 무늬의 표현, 뛰어난 조형미, 신비로운 비색, 수준 높은 기술 등의 결과물이다. 더욱이 이들 요소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조화미가 특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고려 공예문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베개·장구·변기까지…일상에 스며든 청자

고려청자는 장식품이 아니었다. 현존하는 고려청자 대부분은 식기나 병·주전자와 같은 일상 생활용품이었다. 고려인의 소소한 일상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물이다. 다만, 향유층은 사회지배층인 왕족과 귀족, 승려들이었다. 그래서 화려하면서도 친숙하고 값지다. 특히 상감법은 중국에서 볼 수 없었던 우리 선조들의 창조정신의 산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68호),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국보 60호),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국보 95호) 등 예술품이나 제기도 있지만, ‘청자 상감모란문표주박모양 주전자’(국보 116호),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보물 416호), ‘청자 쌍사자형 베개’(보물 789호)’,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보물 1782호) 등 다양한 종류와 형태로 제작됐다. 여기에 ‘청자 기와’, ‘청자 변기’, ‘청자 주사위’ 등도 만들었다.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풍성함을 잘 보여준다.

청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정보를 품고 있다. 시대상은 물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 정서, 미적 감각, 세계관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고려 지배계층이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한 공예품으로 당시 생활상 연구에 귀한 자료들이다.



◇왜 강진에서 꽃피웠을까

고려청자는 강진에서 꽃을 피웠다. 1964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청자가마터를 찾아냈고, 발굴을 통해 궁궐에 쓰인 청자기와를 비롯한 최고급 고려청자가 이 곳에서 구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주요 수요처인 개경과 멀리 떨어진 강진의 외딴 바닷가에서 청자를 구웠을까?

그 답은 ‘해상왕 장보고’에 있다. 신라 말 장보고로 대표되는 전라도 해상 세력은 신라·당·왜 3국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용한 바닷길은 청해진(완도)을 중심으로 전라도 해안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최첨단 신기술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신기술이라도 기초가 없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서남해안은 고대 대형옹관을 만들어 사용했던 지역이다. 이 토기 제작 기술이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청자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양식과 기술이 덧대어졌다.

강진은 또 청자 생산에 필수적인 땔감과 도자 원료인 고령토·규석 등 질 좋은 태토가 풍부했고, 소비처인 개경으로 뱃길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바닷길을 품은 강진은 역사·지리적 환경, 기술의 축적, 자연 조건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청자 기술을 흡수·축적·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강진 대구면 일대에는 청자가마터가 지천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청자요지만 188개소에 이른다. 대구면 용운리 75곳, 계율리 59곳, 사당리 43곳, 수동리 6곳과 칠량면 삼흥리 5곳 등이다.

이렇다보니 강진군 대구면 출신 이용희(81) 전 고려청자박물관 연구개발실장이 들려준 “청자로 비석치기도 하고, 개 밥그릇으로 쓴 집도 있었어. 널린 게 청자 조각이었으니까.”라는 이야기가 사실로 다가온다.

지난 5~9일 강진 청자촌에서 ‘제47회 강진 청자축제’가 열렸다. 강진군은 고려청자 제작과정 시연과 체험 프로그램, 국내 유일 강진 관요와 민간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매년 마련하고 있다.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에서는 오는 11월24일까지 ‘하늘의 조화를 빌리다’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05년 전인 1914년 6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강진 청자요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창덕궁 주합루에 진열, 첫 공개한 이래 지금까지 발굴조사한 사진과 도면 등을 정리해 특별전을 연 것이다.

부릅뜬 눈만 부각시켜 조각한 황이(黃彛)를 비롯해 정교한 국화와 연꽃 장식의 받침(臺)은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기로 이번 특별전을 통해 최초 공개됐다. 복숭아를 들고 있는 인물 모양의 주자(국보 167호), 물오리가 노니는 연못 풍경을 조각한 정병(보물 344호), 울창한 대숲을 연상시키는 죽절문병(국보 169호)은 강진에서 만들어진 유물이다.

강진 청자촌은 선조들의 예술혼을 잇고자 힘을 쏟고 있다. 1986년 문을 연 고려청자박물관은 꾸준히 청자도예 기술을 향상시키며 관요와 민간요를 육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방유형문화재 이용희 청자사기장과 김경진 명장, 방진영·이막동 명인 등을 배출했고, 이들의 지도를 받으며 도공 40여명이 고려청자의 맥을 잇고 있다.

강진군은 대구면 사당리·용운리 일대 청자요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주소화 중국 절강대학 교수는 “강진 청자요지의 발굴과정을 참관하고, 새로 발굴된 고려청자 특수기와와 대형 매병, 많은 청자편들을 보면서 고려청자 본향의 자존심을 유감없이 보여줬다”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강진=박정욱·남철희 기자 jw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