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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생각’]백범이 향나무를 심은 뜻은
2019년 08월 01일(목) 04:50
1946년 8월, 백범 김구 선생은 충남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일제 침략자들이 이 강토에서 물러가자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침략자들에 항거한 투쟁의 역사가 담긴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선생이 마곡사에서 특별 강연을 한 건 수감 생활을 했던 인천 감옥에 이어 두 번째 대중 집회였다.

백범 선생에게 마곡사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인천감옥에서 탈옥한 선생은 세상살이에 무상함을 느끼고 방랑하다가 마곡사에 들어가 삭발례를 올린 뒤,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불가에 귀의했다. 나중에 평양의 영천암에서 주지로 주석하기까지 했지만 선생은 도저히 침략자의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승려 생활을 떨쳐 버리고,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침략자들이 물러간 조국에 돌아와 마곡사를 찾은 선생은 옛일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무궁화와 향나무를 심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당시 심은 무궁화는 오래전에 죽고 없어졌지만, 향나무 한 그루는 아직도 살아 있다. 키 5m 남짓에, 줄기 둘레가 1m도 안 되는 작은 나무이지만 ‘백범 향나무’라는 별명과 함께 뜸직한 자태로 살아남은 것이다.

처음에 선생이 나무를 심은 자리는 마곡사 경내에 들어서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극락교 앞이었다. 그러나 한때 나무의 생육 상태가 나빠지자, 백범 선생이 승려 생활을 할 때 머무르던 요사채 앞으로 옮겨 심었다. 생육 위기를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선생의 자취를 함께 볼 수 있는 자리여서, 오히려 잘 됐지 않나 싶다.

백범 향나무는 절집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아름다운 모양으로 자랐다. 수백 년 된 여느 향나무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생김새다. 작지만 민족혼의 기개를 담은 나무라는 생각 때문에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줄기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 향나무는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는 나무 가운데 하나다. 향기가 좋기 때문에 한자로는 목향(木香)이라고 쓰기도 한다. 대부분의 향을 나무에서 만들어 내던 옛날에, 향기를 얻기 위해 심어 키운 나무다. 향나무의 향기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할 뿐 아니라,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간다는 생각에서 향나무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 왔다. 불가(佛家)의 의식이나 민간의 제사 때에 향불을 피우는 것도 그래서다.

백범 선생이 마곡사에서 향나무를 골라 심은 것도, 우리 옛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백범 선생은 조국을 향한 충정, 민족의 평화를 향한 희망의 염(念)을 상징할 수 있는 나무를 찾았다. 침략자들은 물러갔지만, 우리의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라는 점을 안타까워한 선생은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으며, 침략자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담을 수 있는 나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족 해방의 뜻을 오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철 푸르른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 즉 향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완전한 해방을 향한 민족의 기원이 하늘 끝까지 닿을 수 있도록 침략자의 악취를 말끔히 씻어 낼 향기까지 지닌 나무였으니, 그만큼 알맞춤한 나무가 없었다. 결국 독립투사 백범은 이 땅의 완전한 광복과 해방을 향한 처절한 염원을 담아 향나무 한 가루를 고이 심은 것이다. 형태로 남지 않은 사람의 한과 기원은 그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 안에 고스란히 남았다. 아직 어린 나무이지만 잘 보호하며, 나무를 심은 사람의 뜻을 오래오래 헤아려야 할 일이다.

잊고 싶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침략자의 역사를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 보게 되는 시절이다. 얼마 전 세상을 달리한 시인 허수경이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에 남긴 한 문장이 아프게 되살아난다. “기억하지 않고 묻어 버린 공동체의 과거는 언젠가 그 공동체에 비수를 들이댄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와 해결하지 않은 채 묻어 두었던 한 많은 기억들이 비수 되어 꽂히는 이즈음,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열혈남아 백범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에 담긴 뜻을 곰곰 되새겨야 할 이유가 또렷이 살아 오른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