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표충사 : 400년 이어온 서산대사의 숨결…호국정신을 기리다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대사
영정 봉안한 사당 ‘표충사’
불심과 충심은 한 마음
임진왜란때 승군 이끌고 왜구 물리쳐
정조가 직접 표충사 사액
‘어서각’ 편액도 왕이 직접 하사
영정 봉안한 사당 ‘표충사’
불심과 충심은 한 마음
임진왜란때 승군 이끌고 왜구 물리쳐
정조가 직접 표충사 사액
‘어서각’ 편액도 왕이 직접 하사
![]()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는 서산대사와 제자인 사명대사, 의병에 참전했던 처영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서선대사의 충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유교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사찰에 사당을 짓고 왕이(정조) 편액을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대사의 호국정신이 깊고 높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
땡볕이다. 무시로 쏟아지는 뙤약볕에 연신 땀이 흐른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견딜 만 하다.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던 지난해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흘렀다.
여름 손님은 호환마마보다 무섭다고 하는데, 손님처럼 해남 대흥사(주지 법상)에 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 온다 해도 쉽지 않다. 대가람이자 대명찰이어서 갈 때마다 조심스럽다.
엊그제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반환점을 돌고 4회가 지났다. 누군가는 그랬다. 세월은 비누처럼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고. 움켜쥔 손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같다고. 금새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므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8월로 들어서면 시간은 또 그렇게 줄달음칠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중간을 넘으면 금세 저편으로 기우는 것이어서, 올해의 끝자락 또한 시나브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인 듯하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도시 알 수 없는 것처럼, 끝자락에 다다르고 나면 꿈만 같은 것이다. 이내 다른 사물에 동화되는 ‘여물동화’(與物同化)의 경지가 그런 것이다.
대흥사 표충사 앞에서 삼국유사의 설화를 떠올린다. 이곳은 서산대사(1520~1604)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다. 고승대덕의 도타운 숨결이 400년을 이어져 왔다. 삶에 있어 시간이란 그렇게 찰나처럼 흐르는 것인가 보다. 누구도 화르르 날아가는 시간의 날개를 붙잡을 수 없다.
신라시대, 세달사라는 절에 조신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어느 날 태수(오늘의 군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그러나 불가의 사람이 속세의 처자에게 고백을 할 수는 없는 법. 망설이던 차에, 여인은 결국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 그러나 여인을 잊을 수 없었던 조신은 관세음보살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을 떠보니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처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을 만난 이후 하루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여인이 눈시울을 붉혔다. 조신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과 살기 위해 미련없이 하산을 결행한다.
그러나 삶은 고해(苦海)였다. 현실 속 사랑은 견고하지 않는 법. 조신은 다섯 명의 자녀와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뼈가 바스러지도록 일했다. 그러나 한 아이가 죽게 되고 생활고는 점점 목까지 차오른다. 두 사람은 각자 아이들을 나눠 맡기로 한다. 조신은 부인과 아이들을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쏟다가 그만 잠에서 깨어난다. 그가 있는 곳은 관음보살상 앞이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간 것이었다. 조신의 머리는 온통 백발로 변해 있었다. 시간 앞에서 그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행만이 지난 과오를 참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불심을 곧추세운다.
모든 이의 시간은 그렇게 화살처럼 지나간다. 나태와 안일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앞의 설화를 기억하길. 그리하여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불살랐던 서산대사의 단심을 생각하길.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맨 앞자리에 섰던 대사의 서늘한 정신을 말이다.
해남 대흥사가 오늘의 대찰에 이른 것은 서산대사로부터 연유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나 오늘날이나 대흥사 위상은 표충사가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불-선 삼교의 정신이 시대와 연하여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무염지 위로 쏟아지는 빛나는 햇살을 바라보다, 혹여 빛나는 햇살이 서산대사의 정신이 현현된 것은 아닌지 신비롭게 쳐다본다. 대흥사 이곳저곳에 그의 서기가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평남 안주 출신으로 호는 청허(淸虛)이고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평양탈환작전을 감행한다. 그를 따르는 승려들과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 그의 심중에는 불심과 충심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심과 충심은 별개의 마음이 아니었다.
“표충사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 의병을 규합해 전쟁에 참전했던 처영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절에 웬 사당이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더구나 청허당 서산대사가 활동한 조선 중, 후기는 유교중심의 사회였는데 말이죠. 그만큼 서선대사의 호국 정신을 국가가 높이 받들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흥사 월우스님은 “이 사당은 정조 12년(1788) 왕이 표충사라 사액했으며 7세법손인 천묵에 의해 건립되었다”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향례를 올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금물을 입힌 ‘표충사’(表忠祠) 글씨가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편액도 정조가 직접 써서 하사했다.
그 뜻이 다함없이 좋다. 충을 드러내는 사당이라는 뜻의 ‘表忠祠’와 왕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御書閣’은 오늘의 시대, 국가란 무엇이며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민초들의 마음과 그것을 헤아릴 줄 아는 지도자의 덕성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표충사 앞에서 오래도록 글자를 바라본다. 사찰 내의 사당은 불교의 포용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그대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왔는가?” 영정 속 서산대사가 묻는다. “시국이 하 수상하여 대흥사에 들렀나이다.” “그래 여기에 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무표정으로 물어오는 영정 속의 대사의 음성이 깊고 맑다. 무어라 답을 할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마다 제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 되는 법. 그러는 중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한자락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겠나” 대사는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시대다. 지나치게 다양한 단체의 목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어느 결에 국가는 뒤로 사라지고 안중에도 없다. 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자리는, 서산대사와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솟을대문 형식의 내삼문(內三門)을 바라보다, 경내의 비각이 들어온다.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지붕돌이 예사롭지 않다.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이라는 글귀로 보아 정조 15년(1791)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산대사의 충과 인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
여름 손님은 호환마마보다 무섭다고 하는데, 손님처럼 해남 대흥사(주지 법상)에 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 온다 해도 쉽지 않다. 대가람이자 대명찰이어서 갈 때마다 조심스럽다.
8월로 들어서면 시간은 또 그렇게 줄달음칠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중간을 넘으면 금세 저편으로 기우는 것이어서, 올해의 끝자락 또한 시나브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인 듯하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도시 알 수 없는 것처럼, 끝자락에 다다르고 나면 꿈만 같은 것이다. 이내 다른 사물에 동화되는 ‘여물동화’(與物同化)의 경지가 그런 것이다.
![]() 서산대사 영정 |
대흥사 표충사 앞에서 삼국유사의 설화를 떠올린다. 이곳은 서산대사(1520~1604)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다. 고승대덕의 도타운 숨결이 400년을 이어져 왔다. 삶에 있어 시간이란 그렇게 찰나처럼 흐르는 것인가 보다. 누구도 화르르 날아가는 시간의 날개를 붙잡을 수 없다.
신라시대, 세달사라는 절에 조신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어느 날 태수(오늘의 군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그러나 불가의 사람이 속세의 처자에게 고백을 할 수는 없는 법. 망설이던 차에, 여인은 결국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 그러나 여인을 잊을 수 없었던 조신은 관세음보살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을 떠보니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처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을 만난 이후 하루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여인이 눈시울을 붉혔다. 조신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과 살기 위해 미련없이 하산을 결행한다.
그러나 삶은 고해(苦海)였다. 현실 속 사랑은 견고하지 않는 법. 조신은 다섯 명의 자녀와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뼈가 바스러지도록 일했다. 그러나 한 아이가 죽게 되고 생활고는 점점 목까지 차오른다. 두 사람은 각자 아이들을 나눠 맡기로 한다. 조신은 부인과 아이들을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쏟다가 그만 잠에서 깨어난다. 그가 있는 곳은 관음보살상 앞이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간 것이었다. 조신의 머리는 온통 백발로 변해 있었다. 시간 앞에서 그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행만이 지난 과오를 참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불심을 곧추세운다.
모든 이의 시간은 그렇게 화살처럼 지나간다. 나태와 안일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앞의 설화를 기억하길. 그리하여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불살랐던 서산대사의 단심을 생각하길.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맨 앞자리에 섰던 대사의 서늘한 정신을 말이다.
해남 대흥사가 오늘의 대찰에 이른 것은 서산대사로부터 연유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나 오늘날이나 대흥사 위상은 표충사가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불-선 삼교의 정신이 시대와 연하여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무염지 위로 쏟아지는 빛나는 햇살을 바라보다, 혹여 빛나는 햇살이 서산대사의 정신이 현현된 것은 아닌지 신비롭게 쳐다본다. 대흥사 이곳저곳에 그의 서기가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평남 안주 출신으로 호는 청허(淸虛)이고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평양탈환작전을 감행한다. 그를 따르는 승려들과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 그의 심중에는 불심과 충심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심과 충심은 별개의 마음이 아니었다.
“표충사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 의병을 규합해 전쟁에 참전했던 처영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절에 웬 사당이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더구나 청허당 서산대사가 활동한 조선 중, 후기는 유교중심의 사회였는데 말이죠. 그만큼 서선대사의 호국 정신을 국가가 높이 받들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충을 드러내는 사당이라는 뜻의 ‘表忠祠’와 왕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御書閣’ 현판. |
대흥사 월우스님은 “이 사당은 정조 12년(1788) 왕이 표충사라 사액했으며 7세법손인 천묵에 의해 건립되었다”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향례를 올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금물을 입힌 ‘표충사’(表忠祠) 글씨가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편액도 정조가 직접 써서 하사했다.
그 뜻이 다함없이 좋다. 충을 드러내는 사당이라는 뜻의 ‘表忠祠’와 왕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御書閣’은 오늘의 시대, 국가란 무엇이며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민초들의 마음과 그것을 헤아릴 줄 아는 지도자의 덕성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표충사 앞에서 오래도록 글자를 바라본다. 사찰 내의 사당은 불교의 포용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그대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왔는가?” 영정 속 서산대사가 묻는다. “시국이 하 수상하여 대흥사에 들렀나이다.” “그래 여기에 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무표정으로 물어오는 영정 속의 대사의 음성이 깊고 맑다. 무어라 답을 할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마다 제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 되는 법. 그러는 중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한자락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겠나” 대사는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시대다. 지나치게 다양한 단체의 목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어느 결에 국가는 뒤로 사라지고 안중에도 없다. 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자리는, 서산대사와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솟을대문 형식의 내삼문(內三門)을 바라보다, 경내의 비각이 들어온다.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지붕돌이 예사롭지 않다.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이라는 글귀로 보아 정조 15년(1791)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산대사의 충과 인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