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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 魂 <12>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⑤고이면 썩는다…정혜결사와 백련결사
분열·타락에 대한 반성…참수행 주창 ‘한국판 종교개혁’
알력·다툼으로 점철된 불교
지눌, 순천 송광사서 ‘정혜결사’
요세, 강진 백련사서 ‘백련결사’
신앙공동체 ‘결사’방식으로 불교 개혁
2019년 07월 22일(월) 04:50
승보사찰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꽃 피운 곳이다. 맑은 물에 비친 송광사 우화각과 능허교, 임경당의 모습이 청정하다. /순천=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내 ‘만덕산 백련사’ 편액.




보조국사 지눌스님 진영.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고려 불교도 그랬다. 불교국가에서 불교는 그 자체가 지배층이었다. 그러다보니 권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권력이 뒷배를 봐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각종 세제 혜택으로 부를 축적해갔고, 이를 유지하고자 가문에서 승려를 배출했다. 성직자·수도자가 아닌 가문의 재산을 지키고 축적하는 전도사 역할이었다. 심지어 인신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불교는 타락했다.

설상가상, 고려 중기 무신들의 쿠데타 이후 고려사회는 극심한 혼돈으로 치달았다. 중앙에 대한 지방의 대항, 상층사회에 대한 하층민들의 봉기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문벌귀족과 궤를 같이 하던 거대교단의 승려들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무신정권에 맞서 죽비 대신 칼을 들었다. 사찰에는 자비와 평화가 사라졌다. 성스러워야 할 도량에 온갖 무기가 넘쳐나고 승려들은 군사훈련에 매달렸다. 사찰은 싸움을 위한 전초기지로 전락했다.

불교계 내부는 알력과 다툼으로 점철됐다. 선종과 교종은 마치 원수 대하듯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방했다. 불교계를 향한 개탄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이 때 등장한 이가 ‘지눌’과 ‘요세’다. 이들은 신앙공동체인 ‘결사(結社)’라는 방식으로 불교계 개혁을 주창했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순천 송광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원묘국사 요세(1163~1245)는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개창했다.

불교가 신앙이나 종교만이 아니고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불교개혁운동은 곧 사회개혁과 국가개혁 등을 추구하는 마음이었다. 이는 또 불의에 항거하는 의병운동과 민중혁명, 그리고 독립운동,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운동 등의 뿌리가 됐다.

◇불교쇄신운동 ‘결사’

정혜결사는 문자 그대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자는 수심결사(修心結社)다. 불교계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불·독경과 참선·노동에 힘쓰자는 불교쇄신운동이다. 특히, 결사에는 승려뿐만 아니라 왕족과 귀족, 일반 신자들도 동참했다. 그 누구든 평등한 입장에서 모두 함께 한다는 결사였기에 의미가 크다.

당시 교종 승려들이 문벌귀족의 횡포에 부화뇌동하다보니 승려들에 대한 비판은 거세졌고, 쿠데타로 집권한 무신정권은 새로운 기반의 불교가 필요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정혜결사는 정치적·경제적 원조를 받아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정혜결사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불교의 큰 맥을 이루는 조계종에 닿아 있다. 본거지인 송광사에는 오늘날에도 여름·겨울 결제 때가 되면 지눌의 정혜결사 정신을 잇는 스님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백련결사는 정혜결사와 같은 시기에 불교계 내부의 분열과 대립,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정혜결사와는 달리 대각국사 의천의 뜻을 이어 천태종의 실천을 택해 법화경 독송·염불·참회 등의 수행법을 중시했다.

요세는 지눌이 주창한 사유체계가 너무 어려워 지식대중이 아니고는 접근이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참회와 정토다. 혼자 힘으로는 해탈할 길이 없는 가련한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으로 백련결사를 조직했다. 요세가 백련결사에서 참회와 정토신앙을 실천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당시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다수의 농민·천민층에게 불교 신앙의 활로를 터주고자 하는 보살행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보조국사 지눌과 원묘국사 요세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 시호는 ‘불일(佛日)’이다. 지눌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고 했다. 목우자는 ‘소 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십우도의 네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지눌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에 ‘소 걸음 호랑이 눈’(牛行虎視)이 있다. 그는 평소에 ‘소 걸음 호랑이 눈’의 자세로 살았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현실을 통찰하고 삶의 목표를 확립한 다음, 꾸준히 그 목표를 실현하는 삶을 살았다’는 표현이다.

‘호랑이 눈’은 내가 선 지금 여기의 자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직시를 가리킨다. 호랑이는 무엇을 볼 때 곁눈으로 흘겨보거나 고개만 돌려보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돌려 정면으로 쏘아본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똑바로 보는 동물이라 했다.

‘소 걸음’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해가는 실천을 가리킨다. 소의 걸음걸이는 육중한 체중을 싣고 한발짝 한발짝 뚜벅뚜벅 걷는 모습, 비록 빠르지는 않지만 결코 게으름 피지 않는 성실함을 볼 수 있다. 지눌은 12~13세기 고려불교에 대한 ‘호랑이 눈’의 통찰을 통해 정혜결사라는 목표를 확립하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소 걸음’의 실천으로 일관했다.

백련결사를 주도했던 요세는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수학하고 23세 되던 명종 15년(1185년) 승과에 급제했다. 천태종 법회에 참석했다가 크게 실망하고, 동지 10여명과 함께 지눌의 정혜결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는 선의 수행방법과 수행대상에 의문을 제기하며, 1211년 강진 만덕사 옛터에 절을 새롭게 짓고 수행하다 70세 되던 해인 1232년 4월8일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백련결사를 조직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이들 입사자들은 요세스님에게서 참다운 삶의 가치와 희망을 발견했고, 그들 자신도 염불·독송·참회 등을 통해 무명과 번뇌의 옷을 벗고 왕생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중생들을 교화하던 스님은 83세 때인 1245년 가을 어느 날, 가부좌를 틀더니 “50년 산 속에서 썩은 이 물건이 오늘 떠나가니 각자 노력해 법을 위해 힘쓰라”는 말을 남기고 정토로 행했다. 그의 비문을 쓴 고려 최자는 “크나 큰 진리의 깃발을 세워 아직 듣지 못한 세상의 대중을 일깨워주고 근기가 없어 믿지 못하는 자에게 믿음을 내게 하여 조사의 길을 다시 일으키시고 널리 베풀어 그 끝이 다함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순천 송광사와 강진 백련사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서쪽에 위치한 송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 3대 사찰, 8대 총림에 속하는 큰 절이다.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가지 요소인 불(佛)·법(法)·승(僧) 가운데 승, 즉 훌륭한 스님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됐다. 길상사란 조그마한 절이었는데 보조국사가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아 수선사라 불리며 대가람을 갖췄다.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 첫번째 만나는 우화각은 이 절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맑은 물과 돌무지개다리 아래 계류는 폭포를 이루고 있다. 우화각 앞에 깃대처럼 쭉 뻗은 높이 약 15m 고사목은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라고 전해진다.

보조국사와 관련된 명물이 또 하나 있다. 천연기념물 제88호 천자암 쌍향수다. 천자암 오른쪽에 두 줄기 나무가 또아리를 튼 듯 꼬인 곱향나무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것이 인연이 돼 왕자를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짚고 온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자라 쌍향수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련사는 결사 당시 승려가 1000여명, 절집은 8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 말 남해안 일대가 고려청자 주산지이자 곡창지대여서 왜구에 의한 약탈이 잦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고 사찰은 퇴보해 거의 폐사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세종 9년(1426) 주지 행호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1430년 전국을 유람하던 태종의 둘째왕자 효령대군이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며 크게 중창했다. 효종 14년(1762)에 3차 중수를 하면서 원묘국사 탑과 사적비(보물 제1396호)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인 대웅보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원교 이광사(1705~ 1777)의 글씨다. 대웅전 안에 걸려있는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라는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백련사의 ‘사’자가 寺(절)가 아닌 社(모일)다.

/순천·강진=박정욱 기자 jwpark@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