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맥락을 지닌 건축물을 광주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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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찾는 사람들이 감탄하는 대상은 크고 웅장한 현대식 건축물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높이와 규모는 언제든 다른 국가나 도시에서 보란 듯 갱신하며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1931년 세워져 40년 이상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명성을 지녔던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02층)은 이제 우리나라의 롯데월드타워(123층)보다 낮은, 일반적인 높이로 전락했다.
오히려 외부인이나 관광객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도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고,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오밀조밀한 골목길, 오랜 기간 다듬어 온 돌담길, 중세나 근대 양식의 주택과 상점들. 자연경관 등이 이어지고 거기에 도시를 상징할 수 있는 건조물까지 더해지면 매력은 더 높아진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세워진 높이 약 320m의 파리 에펠탑이나 1884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선물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과거 오랜 기간 광주를 상징하는 인공구조물은 광주읍성이었다.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정치와 행정의 핵심 공간으로, 그 바깥에 시장과 거주지가 이어지면서 도시를 구성하였다. 읍성의 둘레는 약 2.5㎞, 높이는 약 2.7m였다. 동문(서원문), 서문(광리문), 남문(진남문), 북문(공북문) 등 네 개의 문이 있었고, 주변에는 해자(垓子)가 있어 광주천·경양방죽 등과 연결돼 있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한 광주의 도시 공간 구조를 깨뜨린 것은 일제였다. 읍성 내 국유지를 일본인들이 사들였으며, 이 읍성을 없애는 것은 곧 일본인 거주지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 성벽처리위원회를 두고 각 지역 핵심 도시에 자리한 읍성을 없앴다. 이후 1910년대까지 필요에 따라 일부분씩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중심부에 서 있는 성벽의 철거는 일제에 의한 인위적인 도시 개발의 서막이기도 하였다.
경복궁 내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이 마치 근정전을 위압하듯 맞은편에 자리한 것과 같이 읍성 내부의 중심이었던 동헌 ‘하모당’(何暮堂)의 반대편에 전남도청이 들어섰다. 동헌은 누각과 삼문 등 15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하는데, 1907년 도청이 들어선 뒤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한일강제합병과 함께 하나둘 철거돼 사라져갔다. 전남도청은 당시 대규모 서양풍 목조건축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근대식 건물이었다. 이후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전남도청이 2005년 무안 남악으로 이전한 뒤 비어 버린 공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선 것은 2015년의 일이다. 전당의 설계안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 장소로서의 전남도청 별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개관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설계자인 우규승의 ‘빛의 숲’의 개념은 주요 시설의 대부분을 지하에 두고 지상을 녹지로 하도록 했는데, 이는 웅장하고 높은 높이의 랜드마크를 바랐던 일부 시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설계자의 디자인 철학은 개관한 지 4년이 지나면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고층 아파트들이 에워싸고 있는 구도심에서 유일무이하게 광주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광주읍성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후 석서정 등 광주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정자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증에 실패한 데다 그것을 어떻게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전략의 부재로, 제대로 광주 구도심의 재생과 연계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민선 7기 광주시가 15세기에 지어져 광주읍성 내 주요 유희 장소였던 희경루(喜慶樓)를 중건하는 사업을 본격화한다고 한다. 60억 원의 예산으로 과연 희경루를 중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또한 원래 자리했던 충장로가 아니라 광주공원 일원에 2022년까지 짓겠다고 해 아무래도 우려가 크다. 중건의 기본 원칙은 그것이 있었던 장소에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최대한 과거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인데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광주의 역사 그리고 광주의 옛 건축물을 통해 구도심을 재생하고, 시민들에게 광주의 자긍심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맥락을 갖춘 복원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층 아파트만 들어서는 도시 공간에 광주를 상징할 수 있는 건축물을 짓는 데 좀 더 노력과 시간과 예산을 투입했으면 한다.
읍성을 중심으로 한 광주의 도시 공간 구조를 깨뜨린 것은 일제였다. 읍성 내 국유지를 일본인들이 사들였으며, 이 읍성을 없애는 것은 곧 일본인 거주지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 성벽처리위원회를 두고 각 지역 핵심 도시에 자리한 읍성을 없앴다. 이후 1910년대까지 필요에 따라 일부분씩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중심부에 서 있는 성벽의 철거는 일제에 의한 인위적인 도시 개발의 서막이기도 하였다.
경복궁 내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이 마치 근정전을 위압하듯 맞은편에 자리한 것과 같이 읍성 내부의 중심이었던 동헌 ‘하모당’(何暮堂)의 반대편에 전남도청이 들어섰다. 동헌은 누각과 삼문 등 15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하는데, 1907년 도청이 들어선 뒤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한일강제합병과 함께 하나둘 철거돼 사라져갔다. 전남도청은 당시 대규모 서양풍 목조건축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근대식 건물이었다. 이후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전남도청이 2005년 무안 남악으로 이전한 뒤 비어 버린 공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선 것은 2015년의 일이다. 전당의 설계안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 장소로서의 전남도청 별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개관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설계자인 우규승의 ‘빛의 숲’의 개념은 주요 시설의 대부분을 지하에 두고 지상을 녹지로 하도록 했는데, 이는 웅장하고 높은 높이의 랜드마크를 바랐던 일부 시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설계자의 디자인 철학은 개관한 지 4년이 지나면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고층 아파트들이 에워싸고 있는 구도심에서 유일무이하게 광주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광주읍성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후 석서정 등 광주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정자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증에 실패한 데다 그것을 어떻게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전략의 부재로, 제대로 광주 구도심의 재생과 연계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민선 7기 광주시가 15세기에 지어져 광주읍성 내 주요 유희 장소였던 희경루(喜慶樓)를 중건하는 사업을 본격화한다고 한다. 60억 원의 예산으로 과연 희경루를 중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또한 원래 자리했던 충장로가 아니라 광주공원 일원에 2022년까지 짓겠다고 해 아무래도 우려가 크다. 중건의 기본 원칙은 그것이 있었던 장소에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최대한 과거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인데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광주의 역사 그리고 광주의 옛 건축물을 통해 구도심을 재생하고, 시민들에게 광주의 자긍심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맥락을 갖춘 복원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층 아파트만 들어서는 도시 공간에 광주를 상징할 수 있는 건축물을 짓는 데 좀 더 노력과 시간과 예산을 투입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