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칠충사를 기억하자
![]() |
호남은 분명히 충신·열사들의 본고장이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그 뒤의 수많은 국난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이 호남이었다. 오죽했으면 충무공 이순신이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 눈물겹고 감격스러운 일은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도 혼자의 몸이 아니라 부자·형제·숙질 등 가족이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호남 사람들에게서 유독 많았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시절, 금산전투에서는 특히 많은 호남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는데 제봉 고경명, 학봉 고인후 부자가 함께 순국했고 큰 아들 준봉 고종후는 또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김상건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친 것도 유명하며, 학포 양팽손의 후손들인 제주 양씨 3형제의 순국도 유명한데, 양산룡·양산숙·양산수가 바로 그들이다. 보성의 선(宣)씨 문중에는 오충사(五忠祠)가 있는데 선윤지·선형·선거이·선세강·선약해 등 5명이 한 집안에서 나온 충신들이었다.
인간의 목숨이 어떤 것인가. 나라를 위해서 그런 귀중한 목숨을 헌신짝처럼 던질 수 있는 충신들의 고향이 호남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또 근래에 나왔다. 위에서 언급한 충신들이야 역사에 혁혁히 빛나는 사실(史實)로 벼슬도 증직되고 시호도 내렸다. 하지만 역사에 묻혀 크게 알려지지 않은 해남 윤씨 가문의 칠충사(七忠祠)에 배향된 인물들이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시절 강진에 거주하던 해남 윤씨 한 가문에서 형제·숙질의 일곱 충신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비극의 역사였다.
칠충사는 강진군 군동면 화방리 소재의 사당으로 지명을 따라 ‘화암사’(華巖祠)라고 부르는데 해남 윤씨 강진파의 윤륜(尹綸)·윤신(尹紳)은 형제요, 그 두 분 형님의 아들인 윤치경(尹致敬)·윤동철(尹東喆) 네 숙질(叔侄)이 순절한 충신이다. 양근 군수 윤이경(尹履慶)과 그 아우 판관 윤익경(尹益慶)은 형제로 순국했다. 윤익경의 아들 윤동로(尹東老) 또한 순절하여 세 숙질이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한 가문에서 일곱 충신이 배출된 것이다. 온 문중에서 단 한 사람의 충신만 나와도 세상에서 이름난 가문이 되는데, 한 가문에서 일곱의 충신이 나왔다면 어디 그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며칠 전 해남 윤씨 중앙종친회장과 몇 분 종친회 임원들이 나를 찾아와 ‘화암사지’(華巖祠誌)라는 책자를 보여 주는데, 바로 해남 윤씨 일곱 충신의 사적을 기록하고 사우(祠宇)에 관계되는 내력을 함께 기술한 책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순국한 충신들의 탁월한 역사를 자손들의 미약함과 지방 유지들의 소홀함으로 묻혀 있던 일이라 했다. 순조 23년인 1823년 뜻있는 선비들의 공론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사우(祠宇)가 건립되었지만 또 고종 5년 1868년에 서원 훼철에 따라 사라진 사당이 되고 말았다. 1926년에야 역사적 사실이라도 기록으로 남기자며 뜻있는 고을 유림들의 노력으로 ‘화암사지’라는 책이 간행되기에 이르러 마침내 일곱 충신들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한 가문에서 일곱의 충신이 나와 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인데 이런 충신들의 의혼을 잊고 살아가는 민족의 장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윤씨 종친회에서 일곱 충신들에 대한 현양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그 일에 도움을 주어, 묻힌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시들어 가는 충의의 정신과 애국심이 살아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일곱 충신들의 몸을 바친 애국심이 없고서야 당시의 나라가 이름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해남 윤씨 한 가문의 혁혁한 애국심은 이제라도 밝게 현양시켜야 한다.
다행히 현 정부는 그동안의 정부와 다르게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한 현양 사업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국난에 처하여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애국자들의 활동은 알려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라도 멀고 먼 지방에서 일어난 많은 애국 운동도 정확히 발굴해서 귀한 충의정신을 발양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칠충사는 강진군 군동면 화방리 소재의 사당으로 지명을 따라 ‘화암사’(華巖祠)라고 부르는데 해남 윤씨 강진파의 윤륜(尹綸)·윤신(尹紳)은 형제요, 그 두 분 형님의 아들인 윤치경(尹致敬)·윤동철(尹東喆) 네 숙질(叔侄)이 순절한 충신이다. 양근 군수 윤이경(尹履慶)과 그 아우 판관 윤익경(尹益慶)은 형제로 순국했다. 윤익경의 아들 윤동로(尹東老) 또한 순절하여 세 숙질이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한 가문에서 일곱 충신이 배출된 것이다. 온 문중에서 단 한 사람의 충신만 나와도 세상에서 이름난 가문이 되는데, 한 가문에서 일곱의 충신이 나왔다면 어디 그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며칠 전 해남 윤씨 중앙종친회장과 몇 분 종친회 임원들이 나를 찾아와 ‘화암사지’(華巖祠誌)라는 책자를 보여 주는데, 바로 해남 윤씨 일곱 충신의 사적을 기록하고 사우(祠宇)에 관계되는 내력을 함께 기술한 책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순국한 충신들의 탁월한 역사를 자손들의 미약함과 지방 유지들의 소홀함으로 묻혀 있던 일이라 했다. 순조 23년인 1823년 뜻있는 선비들의 공론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사우(祠宇)가 건립되었지만 또 고종 5년 1868년에 서원 훼철에 따라 사라진 사당이 되고 말았다. 1926년에야 역사적 사실이라도 기록으로 남기자며 뜻있는 고을 유림들의 노력으로 ‘화암사지’라는 책이 간행되기에 이르러 마침내 일곱 충신들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한 가문에서 일곱의 충신이 나와 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인데 이런 충신들의 의혼을 잊고 살아가는 민족의 장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윤씨 종친회에서 일곱 충신들에 대한 현양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그 일에 도움을 주어, 묻힌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시들어 가는 충의의 정신과 애국심이 살아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일곱 충신들의 몸을 바친 애국심이 없고서야 당시의 나라가 이름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해남 윤씨 한 가문의 혁혁한 애국심은 이제라도 밝게 현양시켜야 한다.
다행히 현 정부는 그동안의 정부와 다르게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한 현양 사업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국난에 처하여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애국자들의 활동은 알려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라도 멀고 먼 지방에서 일어난 많은 애국 운동도 정확히 발굴해서 귀한 충의정신을 발양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