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코무덤(鼻塚)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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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일본의 교토 류코쿠 대학(龍谷大學)에서 ‘수은 강항 선생 국제 학술 세미나’가 있었다. 이날 행사는 ‘일본 강항 선생 연구회’와 ‘한국 강항 선생 기념 사업회’의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어 한국 측에서 광주 유림과 학계, 관련 단체 임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세미나에 앞서 들른 곳이 교토의 코무덤(鼻塚)과 풍국신사(豊國神社)였다.
422년 전 정유재란 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왜군은 해상 방어망을 뚫고 순천·광양·구례를 거쳐 남원성을 점령한 뒤 영호남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때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왜장들에게 “사람의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이므로 머리 대신 코를 잘라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왜장들은 전공을 인정받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조선 백성들의 코를 닥치는 대로 베어갔다. 심지어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까지도 가리지 않고 코를 베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들은 베어진 코를 모아 나무궤짝에 1000개씩 넣어 소금이나 식초 등으로 절인 후 일본으로 보내면 풍신수길은 그 수를 일일이 확인한 후 코 영수증을 써주고 왜장들에게 치하장을 보내 주었다. 이러한 코 베기 만행은 1597년 8월부터 1598년 11월 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얼마나 잔학했으면 지금까지도 어린애들이 울 때 ‘안 그치면 이비야가 잡아 간다’라고 전해 오겠는가? 이 이비야(耳鼻爺)가 바로 정유재란시 코와 귀를 베어가던 왜군을 지칭하는 말로 무서움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정유재란 시 일본에 보내진 코는 대략 12만 6000개로 교토의 풍국신사 앞에 묻혀 있다. 처음엔 코무덤(鼻塚)이라 불렀으나 막부시대 일본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잔인하므로 귀무덤(耳塚)으로 바꿔 부르자고 주장하여 귀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수은 강항 선생이 쓴 간양록에 의하면 1598년 체류 당시 조성된 코무덤은 새로운 산이 하나 생긴 듯 그 높이가 애탕산(愛湯山)의 산허리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왜인들 몰래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 코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문을 부탁하자 강항 선생은 “베어진 코는 서쪽 언덕에 묻혀있고, 큰 뱀 수길은 동쪽에 묻혀 있네, 수길의 몸은 소금에 절어서 악취를 풍길 뿐이로다.(有鼻耳西峙, 修蛇東藏帝, 巴藏鹽鮑魚, 不香之語也)”라고 적어 주었다. 그것은 풍신수길이 1598년 8월 병으로 죽자 그의 부하들이 풍신수길의 죽음을 숨기려고 그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한 달간이나 앉혀 두었던 것을 빗댄 것이었다. 포로 생활 중에도 꺾이지 않은 선비의 기개와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우리가 찾아간 코무덤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장미꽃 한 다발이 유월의 햇볕 아래 외롭게 시들고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 묻혀 400년의 세월을 보낸 고혼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날 일본의 행태를 보면 임진왜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한 일본인 오카야마 젠 이치로(岡山善一郞) 전 천리대학 교수는 “강항 선생이 일본에 있을 때 포로지만 고난을 겪지 않고 편히 지내다 일본인들의 배려로 무사히 귀국했다”며 “강항 선생은 진사과에 합격한 문인일 뿐 유학자로 볼 수는 없다”라고 망언을 했다. 이러한 망언의 이면에는 일본인은 포로들에게도 관대한 인도적인 민족이며, 일본 유학은 포로 강항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의 노력으로 받아들였다는 논지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마치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사죄를 안 하고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하여 경제 보복으로 대하듯 자기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역사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보였다. 강항 선생에 의한 일본 유학의 전수 사실이 제자인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각종 문집과 강항 선생이 일본에 남긴 강항 휘초 21권의 발문 등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를 왜곡하고 자기들 스스로 연구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일본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거를 청산할 때 양국의 관계는 더욱 발전될 것이다.
수은 강항 선생이 쓴 간양록에 의하면 1598년 체류 당시 조성된 코무덤은 새로운 산이 하나 생긴 듯 그 높이가 애탕산(愛湯山)의 산허리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왜인들 몰래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 코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문을 부탁하자 강항 선생은 “베어진 코는 서쪽 언덕에 묻혀있고, 큰 뱀 수길은 동쪽에 묻혀 있네, 수길의 몸은 소금에 절어서 악취를 풍길 뿐이로다.(有鼻耳西峙, 修蛇東藏帝, 巴藏鹽鮑魚, 不香之語也)”라고 적어 주었다. 그것은 풍신수길이 1598년 8월 병으로 죽자 그의 부하들이 풍신수길의 죽음을 숨기려고 그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한 달간이나 앉혀 두었던 것을 빗댄 것이었다. 포로 생활 중에도 꺾이지 않은 선비의 기개와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우리가 찾아간 코무덤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장미꽃 한 다발이 유월의 햇볕 아래 외롭게 시들고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 묻혀 400년의 세월을 보낸 고혼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날 일본의 행태를 보면 임진왜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한 일본인 오카야마 젠 이치로(岡山善一郞) 전 천리대학 교수는 “강항 선생이 일본에 있을 때 포로지만 고난을 겪지 않고 편히 지내다 일본인들의 배려로 무사히 귀국했다”며 “강항 선생은 진사과에 합격한 문인일 뿐 유학자로 볼 수는 없다”라고 망언을 했다. 이러한 망언의 이면에는 일본인은 포로들에게도 관대한 인도적인 민족이며, 일본 유학은 포로 강항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의 노력으로 받아들였다는 논지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마치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사죄를 안 하고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하여 경제 보복으로 대하듯 자기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역사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보였다. 강항 선생에 의한 일본 유학의 전수 사실이 제자인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각종 문집과 강항 선생이 일본에 남긴 강항 휘초 21권의 발문 등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를 왜곡하고 자기들 스스로 연구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일본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거를 청산할 때 양국의 관계는 더욱 발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