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實事求是) 주창한 양득중(梁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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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實事求是) 주창한 양득중(梁得中)
2019년 06월 17일(월) 04:50
서가에서 표지의 색깔이 바랜 책 한 권을 꺼내서 살펴보니 바로 ‘덕촌집’(德村集)이었다. 표지를 넘기자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설명해 주는 ‘해제’(解題)가 보이는데 글의 말미에는 ‘1985년 2월 무등산하 은구당(隱求堂)에서 후학 박석무 근제(謹題)’라고 되어 있으니, 35년 전에 무등산 아래 광주의 ‘한중고문연구소’에서 숨어 살 때에 지었던 글임에 분명하다.

대강 읽어 보니, 영암 출신으로 당대의 대학자이던 덕촌 양득중(1665∼1742)의 문집을 영인본으로 간행하면서 저자가 누구이고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인가를 설명한 글인데,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여 양득중이나 책의 내용도 대강 알아볼 수 있게 정리된 글이었다.

그러나 요즘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세태로 사람들에게 멀어진 채 35년이 지난 오늘, 누가 ‘덕촌집’을 제대로 알며 양득중이라는 탁월한 학자를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비통하고 슬프기만 하다. 양득중은 기묘명현으로 불린 호남의 큰 학자이자 충신이던 학포 양팽손의 6대손이요, 조선 중기의 큰 학자 우산 안방준의 외증손자로 당시는 영암, 지금은 해남의 계곡면 출신이다. 과거에 응시도 포기하고 명망 높은 스승들 아래서 오롯이 학문에만 생을 바쳤다. 하지만 학문이 고명하다는 평가로 참봉·주부·공조좌랑·회인현감·익위·위솔·지평·익찬·김제군수·장령·집의·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등의 벼슬을 두루 역임한 뛰어난 유신(儒臣)의 한 사람이었다.

덕촌은 현석 박세채, 명재 윤증 등 큰 스승의 제자였으나, 마지막은 명재 윤증 문하의 3촌(三村)이라는 명예를 얻으며 대학자의 지위에 올랐다. 40세까지 호남에서 학문 활동을 했으나 스승의 곁에 가까이 가려고 공주의 덕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가 ‘덕촌’이 되었다. 윤증이 소론(少論)의 종장이어서 덕촌도 당연히 소론계로 우암 송시열 계와는 대립각을 세우고 학문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덕촌은 당파 문제나 학술 문제에서도 큰 비중이 있었지만, 특히 조선의 실학사(實學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학자였다. 실학의 선구적인 학자였기 때문이다.

동부승지, 그것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 은일(隱逸) 승지로서 더욱 명예가 높았는데, 임금과 마주 앉아 국사를 논하고 정책을 토론하던 위치에 있던 대단한 신분이었다. 덕촌은 영조에게 올린 글이나 경연에서 직접 아뢴 말을 통해 당시의 가위(假僞)적인 허위지풍(虛僞之風)의 학술 경향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실사구시’라는 중국의 옛날 책에 나오는 명언을 조선에서 최초로 주창(主唱)한 학자였다. 그는 노론 쪽 가위의 학풍을 배격하고 실질·실리·실현 등의 실사구시적 논리로 학풍을 변화시키자고 건의했고, 초야에 묻혀 있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반계 유형원의 저술인 ‘반계수록’을 국가에서 간행하여 유형원의 주장대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실학의 논리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학자였다.

이렇게 뛰어난 호남의 큰 학자에 대한 연구나 현양이 이렇게 더디고 무관심함을 일깨우기 위해 그때의 해제 말미에서 했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선생을 연구하고 현양하는 일이 너무 소홀했다. 그래서 학계나 사회에서 선생은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생은 실학의 선구적인 학자였고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비리를 감히 직언했던 직신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이 책의 영인본 간행으로 널리 문집이 읽혀지고 선생에 대한 연구가 넓고 깊게 진행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한 때로부터 35년,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볼 만한 연구 업적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임금에게 올린 수많은 상소문에서 덕촌은 수취체제(收取體制)를 개선하여 수탈당하는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강조했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당파 싸움을 타파하여 옳고 바른 인재들이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영조는 덕촌의 주장을 받아들여 ‘실사구시’ 네 글자를 궁중의 여러 곳에 현판으로 걸어 놓고 늘 경계를 삼았다고 하는데, 요즘의 세상에서도 ‘실사구시’를 온 나라에 걸어 두고 그렇게 실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오겠는가. 1742년에 세상을 떠난 덕촌, 금년으로 300년이 가까워 온다. 그를 다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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