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류 원조 왕인박사, 고대 일본에 선진 백제문화를 전하다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③한류 원조-<상>일본문화 아버지 왕인
백제의 석학이자 외교관
논어·천자문 들고가 문자 만들어
신문물 전수 日 아스카 문화 시조
오사카에 ‘전왕인묘’·도쿄에 ‘박사왕인비’
백제의 석학이자 외교관
논어·천자문 들고가 문자 만들어
신문물 전수 日 아스카 문화 시조
오사카에 ‘전왕인묘’·도쿄에 ‘박사왕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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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도 한류(韓流)가 있었다. 1600여 년 전인 397년 한자를 일본에 전한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가 한류 원조다. 그는 일본문화의 원류인 아스카(飛鳥)문화 시조다. 논어·천자문 외에 대장장이와 베짜는 사람 등을 데리고 건너간 왕인 박사는 일본 태자의 스승이 돼 일본인들에게 글과 기술을 가르쳤다. 고대 일본 역사서들은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준 ‘글월의 조상님(文祖)’, ‘위대한 학성(學聖)’으로 숭앙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되는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일본 최초 와카 ‘난파진가’ 저자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 겨울잠 자고 지금을 봄이라고 / 피는구나 이 꽃이.”
일본 최초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다. 왕인이 제자인 닌토쿠왕을 새 천황에 천거하며 헌정한 시다.
이 시는 일본 국보 ‘고금집’ 필사본(伊達本·다테본)에 실려있다. 왕인이 와카를 지은 동기도 기록에 나온다.
‘오진왕이 승하하자 태자였던 제5왕자 우지노와키이라쓰코는 제4왕자 오사자키노미코토(닌토쿠왕)에게 즉위할 것을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러는 동안 왕좌는 3년간 비어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왕인은 제4왕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면서 난파진가를 읊었다. 결국 제4왕자가 닌토쿠왕으로 즉위했다.’
왕인은 당시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다. 시에 나오는 ‘난파진’은 지금의 오사카 항구다. 닌토쿠왕은 등극 후 왕인의 뜻대로 난파진으로 천도했다. 난파진의 고진궁(高津宮·다카쓰노미야)이다. 나라(奈良) 땅에 있던 아버지 오진왕의 풍명궁(豊明宮·도요아키라노미야)을 떠나 백제인들의 새 터전 난파진으로 천도한 셈이다.
이 시가는 삼국시대 ‘이두’와 ‘향찰’ 표기를 원용했다. 왕인은 일본 원주민 말에다 한자어를 맞추어 소리(音)와 새김(訓)을 구사하는 일본 최초의 ‘만요가나’(萬葉假名) 표현법을 만들어 ‘난파진가’를 읊은 것이다.
그래서 그를 ‘글월의 조상님’(文祖)으로 숭앙한다.(‘懷風藻’ 751,‘靈異記’ 822 등)
백제인 왕인(王仁)은 4세기 말께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한 대표적 지식인이다. 그는 백제에서도 박사(博士) 칭호를 받은 당대 석학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가르치고, 도자기·기와 기술까지 전해줬다.
일본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일본서기’에는 왕인이라 하였고, ‘고사기’에는 와니라고 했다.
“어느 날 왕이 아직기에게 물었다. ‘혹시 그대를 능가할만한 학자가 있는가?’ 아직기는 ‘왕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탁월한 학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라카와케와 가무나키와케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모셔오도록 했다. 16년 봄 2월 왕인이 도착했다. 왕인은 곧 태자의 스승이 됐다.”
‘고사기’에는 더 구체적으로 ‘와니’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 또 대장쟁이와 베짜는 사람도 함께 왔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도쿄·오사카·교토 곳곳에 왕인박사 흔적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한 왕인 박사의 위업은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그는 한반도 문화를 수출했지만, 그의 위업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역수입됐다.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다.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시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도 왕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박사왕인비’다.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빼곡히 적혀 있다.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로 전해지는 ‘전왕인묘(傳王仁墓)’이다.
지난 4월 27일 오전 11시 히라카타 시 왕인박사 묘를 찾았다. 오사카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정도 떨어진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묘역에 들어서면 ‘백제문’을 만난다. 기와를 얹은 한국식 전통문이다.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한쪽에는 ‘자왈 학이시습지(子曰 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 논어와 천자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보인다.
눈을 돌려 앞을 보면 ‘박사 왕인지묘’라 쓰인 비석이 있다. 높이는 1m의 작은 묘비명이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1600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왕인묘를 인근에는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있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다. 사적인 왕인묘를 기리기 위해 오사카부가 조성한 공원이다.
◇후손들 한·일 오가며 왕인 축제
오사카에서는 매년 11월 3일 ‘사천왕사 왔소’ 축제가 열린다. 1990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왕인 박사를 비롯해 일본에 문물을 전한 이른바 ‘도래인(渡來人)’들의 행차를 재현한 가장행렬이다.
행렬이 오사카 번화가를 관통해 사천왕사에 이르는 동안 형형색색의 고대 복장을 한 4000여 명의 참가자들과 연도의 40만 인파는 일제히 ‘왓쇼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왔소’라는 한국말이 어원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의 고향 영암에서도 매년 4월 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4~7일 영암군 군서면 왕인박사유적지 일원에서 ‘2019 왕인문화축제’가 개최됐다. 12개국 주한외교사절단과 일본 히라카타시·간자키시, 일한친선협회 등 일본방문단이 대거 참석했다. 나흘간 100만 인파가 다녀갔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인 박사 일본 가오’ 퍼레이드. 영암에서 태어나 오경박사로 등용되고, 응신천왕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 문화의 시조가 된 왕인 박사의 도일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일본 사신단과 왕인 박사, 당시 함께 떠났던 도공·야공(대장장이)·와공,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 역할까지 수백명의 행렬이 장관이었다.
이 두 축제는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 문화를 전파한 왕인 박사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축제다. 일본 유학 발전에 이바지한 왕인 박사의 이색적이면서도 훌륭한 업적 덕분인지 축제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은 물론 우리 역사의 자부심까지 느끼게 해준다.
/일본 히라카타시=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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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 겨울잠 자고 지금을 봄이라고 / 피는구나 이 꽃이.”
일본 최초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다. 왕인이 제자인 닌토쿠왕을 새 천황에 천거하며 헌정한 시다.
이 시는 일본 국보 ‘고금집’ 필사본(伊達本·다테본)에 실려있다. 왕인이 와카를 지은 동기도 기록에 나온다.
왕인은 당시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다. 시에 나오는 ‘난파진’은 지금의 오사카 항구다. 닌토쿠왕은 등극 후 왕인의 뜻대로 난파진으로 천도했다. 난파진의 고진궁(高津宮·다카쓰노미야)이다. 나라(奈良) 땅에 있던 아버지 오진왕의 풍명궁(豊明宮·도요아키라노미야)을 떠나 백제인들의 새 터전 난파진으로 천도한 셈이다.
이 시가는 삼국시대 ‘이두’와 ‘향찰’ 표기를 원용했다. 왕인은 일본 원주민 말에다 한자어를 맞추어 소리(音)와 새김(訓)을 구사하는 일본 최초의 ‘만요가나’(萬葉假名) 표현법을 만들어 ‘난파진가’를 읊은 것이다.
그래서 그를 ‘글월의 조상님’(文祖)으로 숭앙한다.(‘懷風藻’ 751,‘靈異記’ 822 등)
백제인 왕인(王仁)은 4세기 말께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한 대표적 지식인이다. 그는 백제에서도 박사(博士) 칭호를 받은 당대 석학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가르치고, 도자기·기와 기술까지 전해줬다.
일본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일본서기’에는 왕인이라 하였고, ‘고사기’에는 와니라고 했다.
“어느 날 왕이 아직기에게 물었다. ‘혹시 그대를 능가할만한 학자가 있는가?’ 아직기는 ‘왕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탁월한 학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라카와케와 가무나키와케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모셔오도록 했다. 16년 봄 2월 왕인이 도착했다. 왕인은 곧 태자의 스승이 됐다.”
‘고사기’에는 더 구체적으로 ‘와니’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 또 대장쟁이와 베짜는 사람도 함께 왔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 도쿄 우에노공원에 세워진 박사왕인비. 비석 앞뒷면에는 박사의 위업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일본 도쿄=최현배 기자 choi@ |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한 왕인 박사의 위업은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그는 한반도 문화를 수출했지만, 그의 위업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역수입됐다.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다.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시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도 왕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박사왕인비’다.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빼곡히 적혀 있다.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로 전해지는 ‘전왕인묘(傳王仁墓)’이다.
지난 4월 27일 오전 11시 히라카타 시 왕인박사 묘를 찾았다. 오사카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정도 떨어진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묘역에 들어서면 ‘백제문’을 만난다. 기와를 얹은 한국식 전통문이다.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한쪽에는 ‘자왈 학이시습지(子曰 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 논어와 천자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보인다.
눈을 돌려 앞을 보면 ‘박사 왕인지묘’라 쓰인 비석이 있다. 높이는 1m의 작은 묘비명이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1600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왕인묘를 인근에는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있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다. 사적인 왕인묘를 기리기 위해 오사카부가 조성한 공원이다.
![]() 히리카타시 묘역에서 백제문을 지나면 마주하는 왕인묘. 가운데 비석에 '박사 왕인지묘'라고 쓰여있다./일본 도쿄=최현배 기자 choi@ |
오사카에서는 매년 11월 3일 ‘사천왕사 왔소’ 축제가 열린다. 1990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왕인 박사를 비롯해 일본에 문물을 전한 이른바 ‘도래인(渡來人)’들의 행차를 재현한 가장행렬이다.
행렬이 오사카 번화가를 관통해 사천왕사에 이르는 동안 형형색색의 고대 복장을 한 4000여 명의 참가자들과 연도의 40만 인파는 일제히 ‘왓쇼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왔소’라는 한국말이 어원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의 고향 영암에서도 매년 4월 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4~7일 영암군 군서면 왕인박사유적지 일원에서 ‘2019 왕인문화축제’가 개최됐다. 12개국 주한외교사절단과 일본 히라카타시·간자키시, 일한친선협회 등 일본방문단이 대거 참석했다. 나흘간 100만 인파가 다녀갔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인 박사 일본 가오’ 퍼레이드. 영암에서 태어나 오경박사로 등용되고, 응신천왕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 문화의 시조가 된 왕인 박사의 도일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일본 사신단과 왕인 박사, 당시 함께 떠났던 도공·야공(대장장이)·와공,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 역할까지 수백명의 행렬이 장관이었다.
이 두 축제는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 문화를 전파한 왕인 박사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축제다. 일본 유학 발전에 이바지한 왕인 박사의 이색적이면서도 훌륭한 업적 덕분인지 축제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은 물론 우리 역사의 자부심까지 느끼게 해준다.
/일본 히라카타시=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