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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영의 한국영화 100년]<6>1958~1959 중흥기 맞은 한국 영화 이승만 우상화 총동원
1958년 83편·1959년 111편 제작…가파른 상승
동양 최대 안양촬영소 건립…잇따른 흥행실패로 도산
바통 이은 신상옥 감독 ‘신필름’ 60년대까지 위용 과시
김지미·홍성기 감독 커플 이어 신상옥·최은희 커플 활약
정치깡패 임화수, 반공예술인단 결성…이승만에 충성
2019년 03월 27일(수) 00:00
한국영화는 1958년부터 중흥기를 맞기 시작한다. 1955년 14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이었던 제작편수가 1958년 83편으로 늘었고, 1959년에는 111편이 만들어지면서 한 해 100편을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양 최대의 영화촬영소인 안양촬영소가 건립됐다. 이승만 정권의 특혜 속에 1957년 6월 건립된 안양촬영소는 3만평이 넘는 부지에 최신식의 영화 기자재가 갖춰진 그야말로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하지만 안양촬영소는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첫 번째 작품 ‘생명’(1958·이강천)과 두 번째 작품 ‘낭만열차’(1959·박상호)가 내리 흥행에서 실패하자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그렇게 안양촬영소는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도산했다.

하지만 촬영 스튜디오의 명맥은 신상옥 감독이 잇게 된다. 신상옥 감독은 1960년 ‘신상옥 푸로덕션’을 ‘신필름’으로 바꾸고 영화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하는 영화 스튜디오를 표방했다. 그렇게 ‘신필름’은 60년대 내내 그 위용을 과시했다.

1958년과 1959년 두 해에 걸쳐 두각을 나타낸 영화인들은 배우 김지미와 감독 홍성기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배우와 감독으로 만나 결혼까지 골인했을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다. 그들은 ‘산 넘어 바다건너’(1958)와 ‘별아 내 가슴에’(1958), 그리고 ‘비극은 없다’(1959)와 ‘청춘극장’(1959)을 연속해서 히트시키며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특히 ‘청춘극장’은 그해 한국 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크게 성공한 영화다. 신문 연재와 라디오 방송극을 통해 인기를 얻은 김내성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젊은 청춘들의 사랑을 담고 있다.

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
‘청춘극장’은 1966년 윤정희와 1975년 정윤희 주연으로 리메이크 될 정도로 한국영화사에서 반복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소동 감독이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아리랑’(1957)에 이어 내놓은 ‘돈’(1958)은 이 시기에 나온 영화 중 으뜸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손기현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1950년대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 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김승호와 최남현의 연기가 빼어나고 최은희와 김진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58년은 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김수용 감독이 데뷔작을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양주남 감독의 ‘배뱅이 굿’(1957)의 연출부로 연출수업을 쌓은 후에 내놓은 ‘공처가’(1958)는 만담가로 유명한 장소팔과 백금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홈드라마 형식의 코미디영화다.

이 시기를 포함해 1950년대 중후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는 최은희였다. 최은희는 ‘새로운 맹서’(1947·신경균)로 데뷔한 이후 ‘마음의 고향’(1949·윤용규)을 통해 확실한 주연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 영화에서 동승을 보며 죽은 자식을 떠올리고 그와 교감하는 과부의 심경을 섬세하게 표현한 연기는 일품이다. 특히, 노승과의 의견 대립에서 노승에게 밀리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연기는 대배우를 예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후 최은희는 신상옥의 영화들에서 인고하는 조선의 여인상을 주로 연기했고, 때로는 근대적 욕망의 여인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상옥의 여섯 번째 작품인 ‘지옥화’(1958)는 최은희의 도발적인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기지촌에 빌붙어 사는 영식과 영식의 동생 동식 사이에 끼어든 양공주 소냐를 연기한 최은희는, 기존의 다소곳하고 참한 역할을 벗어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객은 그녀에게서 도발적인 여성상보다는 전통적 여성상을 보기를 원했다. ‘지옥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

이에 반해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은 흥행에 성공했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살인죄로 기소된 여인을 위해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를 연기했는데, 과연 최은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1959년 한 해 동안에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 ‘동심초’, ‘춘희’ 등을 히트시키며, 홍성기와 김지미 커플에 필적했다. 두 부부의 격돌은 1961년 ‘성춘향’과 ‘춘향전’에서 다시 재현된다.

최은희가 1950년대 중후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였다면, 이 시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 감독은 한형모다. 한형모 감독은 ‘자유만세’(1946), ‘마음의 고향’(1949)등의 영화에서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후에, ‘성벽을 뚫고’(1949)로 데뷔했다. 이후 ‘운명의 손’(1954)과 ‘자유부인’(1956)같은 파격적인 작품을 연출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감독이었다. 뮤지컬적인 요소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청춘쌍곡선’(1956)과 박계주의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순애보’(1957), 그리고 여사장’(1959)등의 영화들은 이를 증명한다. 특히, ‘여사장’(1959)과 ‘언니는 말괄량이’(1961)는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며 남성중심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형모 감독은 이들 영화의 끝맺음에 있어서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것을 선택하며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청춘극장’(1959) 등을 흥행시킨 김지미.
이 시기를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정치깡패 임화수다. 임화수는 이승만의 대통령 선거 당선을 위해 결성된 반공예술인단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1959년 3월에 반공예술인단을 만들어 배우와 가수들을 동원해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을 시도했다. 명백하게도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의 당선을 위한 아부와 충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대표적인 영화가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신상옥)이다. 이승만의 청년시절 독립투쟁을 담은 이 영화는 자유당으로부터 거금을 지원받아 국내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총동원되었다. 정말이지 이 영화 속에는 당대의 최고배우들이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총출동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당시 임화수의 완력과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