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팽목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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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먼지가 이른 봄날의 산하를 통째로 삼켜 버린 삼월의 아침. 국도 18호선을 따라 진도로 향한다. 세월호 참사의 상흔을 되새기는 기억의 행로다. 진도대교를 건너니 해풍을 맞으며 한데서 겨울을 이겨 낸 봄동 수확이 한창이다. 진도읍을 지나 서남쪽 해안을 향해 30여 분쯤 달리면 방파제 위로 붉은 등대가 또렷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로 불리는 팽목항에 솟은 ‘기다림의 등대’다.
세월호가 인양돼 떠나고 참사의 흔적마저 하나둘 지워지고 있지만, 방파제에 조성된 ‘기억의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방문객들을 맞는다. 손바닥 크기의 네모난 타일 4656장으로 꾸며진 길이 195m의 벽이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 전국의 어린이와 주민들, 그리고 많은 예술인들이 새긴 추모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거기엔 참사에 대한 분노와 슬픔,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진실 규명과 안전 사회에 대한 다짐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가 운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창자가 끊어지도록 운다/ 진도 바닷가/ 어미 소들이 운다.” “봄꽃들아/ 아이들아/ 기억하고 기다릴게.”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꼭 만들어 줄게.” 세월호 추모의 상징이 된 수천 개의 노란 리본들이 흩날린다. 그 기억의 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잊지 않을게’다. 유족들이 만든 타일의 문구엔 생때같은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부모들의 애끓는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문구를 읽어 가다 보면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다. 추모객들의 눈자위도 어느새 벌게졌다.
장대 끝에 나무 새를 매단 다섯 개의 솟대들도 지금까지 유해조차 찾지 못한 다섯 명의 희생자를 기다린다. 대형 노란 리본 조형물과 ‘기다림의 의자’를 지나 방파제 끝에 다다르면, 등대 앞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 벤치와 ‘하늘나라 우체통’이 보인다.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한 우체통에는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소통으로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단다.
방파제 너머 바다 위에는 상조도와 하조도를 비롯한 15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조도 군도가 새떼처럼 무리 지어 있다. 사고 지점인 맹골 수도는 그 섬들을 지나 남서쪽으로 30㎞ 가량 떨어진 맹골도와 거차도 부근이어서 보이지 않는다.
팽목항 광장에는 컨테이너를 이어 붙여 만든 ‘세월호 팽목 기억관’이 있다. 이곳은 원래 유족들이 희생자 304명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고 미수습자들을 기다리며 추모하던 분향소였다. 2017년 4월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고 지난해 4월 정부 합동 영결식이 치러진 이후, 대부분의 유족들은 영정 사진과 유품을 안고 철수했다.
컨테이너 안팎의 벽면에는 ‘봄꽃처럼 아름다웠던’ 단원고 학생들의 반별 단체 사진을 담은 펼침막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희생자들의 영정을 담은 영상과 수천의 하얀 종이배를 쌓아 만든 세월호 모형, ‘기억 나무’와 노란 바람개비, 그리고 시화들이 그날의 아픔을 일깨운다. 방명록에는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부끄러워하며 평안을 기원하는 글귀가 가득하다.
세월호를 만나려면 팽목항에서 60여㎞ 떨어진 목포 신항으로 가야 한다. 해남 화원과 영암 금호도를 지나 목포 허사도에 들어서면 목포 신항만(주) 건물이 보인다. 철망 너머 부두엔 시뻘겋게 녹이 슬고 처참하게 찌그러진 선체가 세워져 있다. 뱃머리에 새겨진 ‘SEWOL’이라는 글자가 아니면 무슨 배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맹골 수도에 잠들어 있던 세월호는 참사 3년 만인 지난 2017년 3월 23일 물 위로 인양됐고, 그달 31일 목포 신항으로 옮겨졌다. 침몰 당시 모습 그대로 1년 이상 육상에 거치됐다가 지난해 5월 10일 바로 세워졌다. 직립 후 세 차례의 수색 끝에 미수습자로 남았던 아홉 명 가운데 네 명의 유해를 수습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아직 다섯 명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 선체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진상 조사를 위해 당분간 목포 신항에 머물게 된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대형 재난 앞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정부. 승객들에겐 ‘가만히 있으라’ 해 놓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돈벌이에 눈먼 해운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 관피아들의 행태가 그랬다.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 사고 후 초동 대처 실패, 뒤늦은 구조, 꼬리 자르기에 급급했던 진상 조사도 거기에서 비롯됐다. 이를 목도한 국민들의 분노는 촛불 시위로 나타났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나라다운 나라’ ‘안전 사회’에 대한 요구도 갈수록 커졌다.
이제 참사 이후 다섯 번째 봄을 맞는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대형 재난은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 장성 효사랑병원,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밀양 세종병원 등의 화재는 물론이고 인천 영흥도 선박 충돌 같은 해상 사고도 반복됐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업 현장의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그런 사이 또 다른 적폐들이 곰비임비 쌓이고 있다.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진정 우리 사회는 “대형 사고를 반복적으로 겪어도 사회적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 병든 구조”인 것일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이 미흡한 가운데, 지금도 사회적 재난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정호승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는 시구처럼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망각으로 인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국가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책무는 살아남은 우리에게 있다. 이는 세월호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 하는 점과 맞닿아 있다. 유가족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몰 원인과 구조 및 수습 과정 등에 대한 완전한 진상 규명뿐이다. 아울러 참사 이후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의 기억을 부단히 재생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또 다른 비극을 막고 ‘유예된 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다.
<논설실장·이사>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 전국의 어린이와 주민들, 그리고 많은 예술인들이 새긴 추모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거기엔 참사에 대한 분노와 슬픔,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진실 규명과 안전 사회에 대한 다짐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가 운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창자가 끊어지도록 운다/ 진도 바닷가/ 어미 소들이 운다.” “봄꽃들아/ 아이들아/ 기억하고 기다릴게.”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꼭 만들어 줄게.” 세월호 추모의 상징이 된 수천 개의 노란 리본들이 흩날린다. 그 기억의 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잊지 않을게’다. 유족들이 만든 타일의 문구엔 생때같은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부모들의 애끓는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문구를 읽어 가다 보면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다. 추모객들의 눈자위도 어느새 벌게졌다.
방파제 너머 바다 위에는 상조도와 하조도를 비롯한 15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조도 군도가 새떼처럼 무리 지어 있다. 사고 지점인 맹골 수도는 그 섬들을 지나 남서쪽으로 30㎞ 가량 떨어진 맹골도와 거차도 부근이어서 보이지 않는다.
팽목항 광장에는 컨테이너를 이어 붙여 만든 ‘세월호 팽목 기억관’이 있다. 이곳은 원래 유족들이 희생자 304명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고 미수습자들을 기다리며 추모하던 분향소였다. 2017년 4월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고 지난해 4월 정부 합동 영결식이 치러진 이후, 대부분의 유족들은 영정 사진과 유품을 안고 철수했다.
컨테이너 안팎의 벽면에는 ‘봄꽃처럼 아름다웠던’ 단원고 학생들의 반별 단체 사진을 담은 펼침막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희생자들의 영정을 담은 영상과 수천의 하얀 종이배를 쌓아 만든 세월호 모형, ‘기억 나무’와 노란 바람개비, 그리고 시화들이 그날의 아픔을 일깨운다. 방명록에는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부끄러워하며 평안을 기원하는 글귀가 가득하다.
세월호를 만나려면 팽목항에서 60여㎞ 떨어진 목포 신항으로 가야 한다. 해남 화원과 영암 금호도를 지나 목포 허사도에 들어서면 목포 신항만(주) 건물이 보인다. 철망 너머 부두엔 시뻘겋게 녹이 슬고 처참하게 찌그러진 선체가 세워져 있다. 뱃머리에 새겨진 ‘SEWOL’이라는 글자가 아니면 무슨 배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맹골 수도에 잠들어 있던 세월호는 참사 3년 만인 지난 2017년 3월 23일 물 위로 인양됐고, 그달 31일 목포 신항으로 옮겨졌다. 침몰 당시 모습 그대로 1년 이상 육상에 거치됐다가 지난해 5월 10일 바로 세워졌다. 직립 후 세 차례의 수색 끝에 미수습자로 남았던 아홉 명 가운데 네 명의 유해를 수습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아직 다섯 명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 선체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진상 조사를 위해 당분간 목포 신항에 머물게 된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대형 재난 앞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정부. 승객들에겐 ‘가만히 있으라’ 해 놓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돈벌이에 눈먼 해운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 관피아들의 행태가 그랬다.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 사고 후 초동 대처 실패, 뒤늦은 구조, 꼬리 자르기에 급급했던 진상 조사도 거기에서 비롯됐다. 이를 목도한 국민들의 분노는 촛불 시위로 나타났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나라다운 나라’ ‘안전 사회’에 대한 요구도 갈수록 커졌다.
이제 참사 이후 다섯 번째 봄을 맞는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대형 재난은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 장성 효사랑병원,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밀양 세종병원 등의 화재는 물론이고 인천 영흥도 선박 충돌 같은 해상 사고도 반복됐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업 현장의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그런 사이 또 다른 적폐들이 곰비임비 쌓이고 있다.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진정 우리 사회는 “대형 사고를 반복적으로 겪어도 사회적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 병든 구조”인 것일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이 미흡한 가운데, 지금도 사회적 재난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정호승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는 시구처럼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망각으로 인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국가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책무는 살아남은 우리에게 있다. 이는 세월호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 하는 점과 맞닿아 있다. 유가족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몰 원인과 구조 및 수습 과정 등에 대한 완전한 진상 규명뿐이다. 아울러 참사 이후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의 기억을 부단히 재생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또 다른 비극을 막고 ‘유예된 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다.
<논설실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