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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 혼(魂) <제1부> 의로운 땅] <5> ④ 고려 개국과 멸망을 함께 한 충신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고려의 마지막 충신 전신민
궁예 추방하고 왕건 추대한 신숭겸, 왕건 갑옷 입고 전사
정몽주 절친 전신민, 고려 망하자 담양 내려와 은둔 생활
‘국란 극복의 부적’ 정지 장군 갑옷, 의병장들이 애용
2019년 02월 26일(화) 00:00
고려의 영웅 신숭겸 장군 탄생지에 세운 곡성 목사동면 용산재. 앞이 확 트여 호연지기가 저절로 발휘된다.
신숭겸·전신민·정지, 고려 명장이자 충신이다. 이들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무장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운 명장이요, 고려와 생을 함께 한 충신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은 천양지차다. 신숭겸은 고려를 연 개국공신으로써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신민은 망국의 한(恨)을 안고 무등산 기슭으로 숨어들었다. 우리나라 수군을 창설한 정지는 몇 차례 정쟁에 휘둘리더니 중앙정치에 회의를 느껴 낙향, 고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이들의 삶의 괘적은 유적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신숭겸의 탯자리인 용산재는 앞이 확 트여 호연지기를 저절로 뿜어낸다. 반면 전신민의 독수정은 주변의 산세와 원림에 뒤덮여 ‘은둔’이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무등산 기슭 담양에 은거한 서은 전신민이 지은 독수정. 안에서도 밖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은둔의 정자’다.


◇‘충신의 끝판왕’ 곡성 신숭겸

“님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 오오! 돌아보건대 / 그대 두 공신이여 / 오래오래 곧고 곧은 / 업적은 빛나리로소이다”

고려 제16대 왕 예종이 지은 향가계 고려가요 ‘도이장가(悼二將歌)’다.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낙을 추도하는 노래다. 이 노래의 배경은 이렇다.

927년(태조 10년) 고려와 후백제는 후삼국 패권을 놓고 격돌한다. 신라로 진군한 후백제는 경주를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다. 이에 왕건은 공산(팔공산)에 매복, 되돌아오는 후백제군을 기습한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후백제의 견훤은 계략으로 고려군을 유인, 고려군을 대파하고 왕건을 쫓는다. 후백제군의 포위망이 시시각각 좁혀오자 왕건은 고립무원에 빠진다.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신숭겸은 왕건에게 갑옷을 벗어달라고 한다. 그 의도를 눈치 챈 왕건은 ‘같이 죽자’며 완강히 거부한다. 신숭겸은 “왕께서는 반드시 살아남아 후사를 도모하셔야 한다”며 기어이 왕건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유인전술을 편다. 후백제군이 가짜 왕건을 쫓는 사이, 평민으로 위장한 진짜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벗어난다. 그리고 신숭겸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요즘 말로 신숭겸은 ‘충신의 끝판왕’이다. 조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삼국지의 전위를 떠올리게 한다.

신숭겸의 장렬한 최후는 고려뿐만 아니라 조선에 이르기까지 충절·의리의 상징이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은 곡성군 목사동면 구용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능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했다고 한다. 능산은 후삼국 혼란기에 무장으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특히 그가 태어난 곳은 개혁의 기치를 든 구산선문 동리산파의 거점 태안사가 인근이다. 이 곳엔 고려 탄생의 또 다른 주역 도선국사가 득도한 사찰이다. 곡성 청년 능산이 중앙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태안사가 발판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후 능산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를 추방하고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왕건을 추대,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뤘다.

능산은 어떻게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이 됐을까? 그가 평산 신씨 시조가 된 사연이 재밌다.

어느 날 왕건이 장군들과 평산에 사냥을 가던 중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힐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능산이 “소신이 맞히겠습니다.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힐까요?”라고 되묻자,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라”고 명한다. 이에 능산은 날아가는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린다. 왕건이 탄복하며 세 마리 기러기가 날아가던 평산을 그의 식읍으로 하사하고 관향으로 삼게 했다.

장군이 태어난 곡성 목사동면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곳곳에 서려있다. 용산재 뒷산은 신유봉으로 장군이 어린시절 놀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용마를 만났다는 용암, 용마를 타고 건넜다는 용탄, 화장산의 장군생과 철갑암, 그리고 용마를 매었다는 계마석 등등. 태안사에는 장군단이 조성돼 있다. 그가 타던 용마가 장군의 머리를 물고 오자 태안사 스님들이 그곳에 안장시켜 주었고, 용마는 곡기를 끊고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곡성 용산재에는 장군의 탯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용산단이 조성돼 있고, 바로 옆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용산재 담장 너머엔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장군의 뜻을 기리고 있다. 곡성읍 인근 오산면에는 덕양서원이 있다.

신숭겸 장군 영정.


◇“백이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담양 전신민

‘바람과 티끌은 아득하고 나의 감회는 깊은데(風塵漠漠我思長) / 어느 깊숙한 골짜기에 이 늙은 몸을 붙여둘까(何處雲林寄老蒼) / 천리 밖 강호에서 두 귀밑머리는 흰눈빛이 되고(千里江湖雙髮雪) / 백년 가까운 세월에 슬픔만 남아있네(百年天地一悲凉) / 왕손과 꽃다운 풀은 봄의 한이 서렸고(王孫芳草傷春恨) / 두견새는 꽃가지에서 달을 보고 우누나(帝子花枝叫月光) / 바로 이 곳에 뼈를 묻히려고(卽此靑山可埋骨) / 나 혼자 지키며 이 집을 얽었다네(誓將獨守結爲堂)’ -전신민의 ‘독수정원운(獨守亭原韻) 1’

식영정·소쇄원을 지나 산음교를 건너 야트마한 언덕길을 100m쯤 오르면 ‘독수정(獨守亭)’이다. 두 팔로 안아도 안기지 않는 우람한 송림이 사방을 시위하듯 서 있고, 주위엔 소나무 숲과 청량한 대숲이, 계곡 아래엔 자미탄이 흐르는 절경이다. 하지만 독수정은 밖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안에서도 확 트이지 않는다. 숲 속의 ‘은둔’이다.

이 누정은 고려 말 북도안무수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낸 서은(瑞隱) 전신민이 지은 정자다. 포은 정몽주와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고려가 멸망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담양으로 내려와 세운 것이다.

독수정은 특이하게 북향을 하고 앉아있다. 이는 개경을 향해 매일 조석으로 고려왕께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는 전신민의 굳은 의지와 고려를 향한 깊은 충심이 담겨있다. ‘독수(獨守)’란 ‘홀로 지킨다’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夷濟是何人 獨守西山餓(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 백이와 숙제는 누구인가? 스스로의 뜻을 지키다가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는 그가 지은 ‘독수정원운’에 잘 표현돼 있다.

전신민은 이 곳에 숨어살며 스스로를 ‘미사둔신(未死遯臣·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이라고 칭했다.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에서 글자를 따와 호를 서은(瑞隱·서석산에 숨음)이라 했다.

인근 식영정·소쇄원·환벽당·취가정 등 누정이 조선 중기 때 지어진데 반해 이 누정은 고려시대에 지어졌다. 한 시대를 앞선 것으로 남도 누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신숭겸 장군 영정.


◇‘조선수군 시조’ 나주 정지 장군

나주 문평 출신 ‘정지’(1347~1391) 장군은 고려 말 최고의 수군 장수다. 보물 제336호로 지정된 그의 갑옷에 얽힌 역사가 흥미롭다. 그의 갑옷은 철편 주위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철편과 철편을 고리로 연결시켜 만든 철의다. 상반신을 화살과 창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경번갑이다. 수군 창설을 주도하고 쓰시마 정벌을 제안한 정지 장군은 광주로 내려와 세상을 마쳤다.

그의 갑옷은 조선시대 국란 때마다 부활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뒤 정지 장군의 갑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 앞에서 제를 올렸다. 또 광주 사람 ‘유평’도 병자호란 때 정지 장군의 철의를 구해 입고 의병을 일으켰다. 장군의 갑옷이 광주 사람들에게는 ‘국란 극복의 신화’였던 것이다.

광주 사람들은 왜 장군의 갑옷을 선호했을까. 그의 삶의 괘적에서 찾을 수 있다.

경열공(景烈公) 정지 장군은 고려 말 무신으로 최영 장군과 더불어 당대의 명장이자 충신이었으며, 고려 수군의 최고 관직인 해도도원수를 지냈다. 이 시기에 전함에 화포를 무장하고 조직적인 훈련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정예 수군을 양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진포대첩과 관음포대첩 등 20여회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서·남해안의 왜구를 축출하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런 그의 업적은 ‘최초로 전함을 건조하고 왜구를 토벌했으며, 수군의 창설이 정지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또 정지 장군은 ‘바다에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는 ‘방왜해전론(防倭海戰論)’을 주창했으며 왜구 소탕을 위한 대마도 정벌 계획을 우왕에게 건의했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을 거쳐 오늘날 우리 해군에까지 이어 내려오는 ‘해양방위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이었던 조선수군의 시조가 정지 장군인 것이다.

광주시 북구 망월동에는 경열사가 있다. 고려 말 충신 경렬공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곡성·담양=글·사진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