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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만세현장을 가다] <1> 광주
1919년 3월 10일 광주 천변 부동교 아래 1천명 ‘만세 삼창’
광주보통학교 학생들 10여명 일제 감시 피해 주도
충장로 4가 ‘삼합양조장’에서 3월 8일 거사 논의
2019년 01월 15일(화) 00:00
1919년 3월10일 광주·전남에서 첫 만세운동이 펼쳐진 광주시 동구·남구를 잇는 부동교 일대. 100년이 지난 현재 3·1운동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올해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는 해다. 임진왜란 의병, 한말 의병, 동학농민혁명 등 나라가 힘든 시기마다 자발적으로 불의에 대항해온 광주·전남지역민들은 3·1운동에도 적극 동참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광주일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만세운동 장소를 찾아간다. 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3·1 사적지를 소개함으로써 선조들이 보여준 정의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919년 광주시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던 충장로 옛 광주우편국.




3·1운동으로 투옥됐다 같은 날 출옥한 수피아여고생들.








◇호남의 만세운동에 불 붙인 광주의 3·1운동=‘광주시사’(光州市史)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광주청년들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독립을 준비했다. 광주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복수, 서울 유학생 박팔준, 광주농업학교생 김용규, 최한영 등 청년 10여명은 옛 광주 적십자병원 인근에 있던 정상호 집에 ‘신문잡지종람소’라는 간판을 내건 뒤 신문과 잡지를 함께 읽고 역사 공부도 했으며 세계정세에 대한 강연도 들었다.

일제 경찰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정상호의 아버지이자 집주인인 정낙교를 압박해 이들을 쫓아냈다. 이후 이들은 지금의 충장로 4가에 있었던 한옥에 ‘삼합양조장’이란 간판을 붙이고, 술을 마시는 등 노는 체하는 방법으로 일제의 눈을 속이고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었던 정광호는 ‘한국청년독립단’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뒤 최한영 등과 3월1일 거사를 준비했다.

1919년 2월 하순께 서울에 있던 김필수 목사는 3·1독립운동준비측으로부터 광주거사에 대한 위촉을 받고 광주에 내려와 최흥종 장로와 김철 등을 만나 의논했다.

광주거사는 최 장로와 김철이 맡기로 했으나, 최 장로가 서울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3월5일 밤 김철은 숭일학교 교사인 김강, 최병준, 삼합양조장 멤버인 황상호, 강석봉, 최한영 등과 광주거사에 대한 준비를 의논하고 각기 담당부서도 정했다. 거사일은 3월8일로, 광주 큰 장날에 맞춰 시민을 총동한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최한영은 최정두·한길상·김용규·범윤두 등과 함께 자기 집 방문을 이불로 가려놓고 밤낮 없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아 2천만 동포’라는 제목의 격문, 애국가, 독립운동가 등을 인쇄했다. 쌀포대로 6가마 분량이었다.

하지만 3월8일 거사는 준비와 연락 부족 등으로 3월10일 현 부동교 아래 광주천변에서 열리는 작은 장날 오후 3시로 연기됐다.

거사일 오후 2시가 되자 양림동쪽에서는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서문통(충장로우체국쪽)에서는 시민들이, 북문통(충장파출소쪽)에서는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부동교 아래로 모였다. 그 인원만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시위 행렬은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갔다. 처음엔 보고만 있던 일본 경찰은 군중이 충장로우체국 앞에 이르자 무장한 기마 헌병대를 동원해 주동인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만 100여명이 붙잡혔다. 특히 수피아여고에 재학 중이었던 윤형숙은 헌병대에 의해 한팔이 잘리면서도 끝까지 만세를 불러 다음날 일본 육군성에 보고되기도 했다.

만세행렬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고, 다음날과 13일 큰 장날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43명이 추가로 구금당했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직원이었던 황상호·흥덕주·장호조는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당시 김철이 법정에서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고 말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광주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심한 탄압에도, 전남지역으로 확대돼 불꽃을 이어갔다.

3·1운동으로 투옥됐다 같은 날 출옥한 수피아여고생들.








◇아직도 남아 있는 친일 잔재와 외면 받는 3·1사적지=13일 방문한 광주공원 비군(碑群)은 광주의 근대사를 논할 때 논쟁거리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이 비군은 광주시가 지역에 흩어진 비석을 모아 지난 1965년 조성했다. 이곳에서는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都元帥 忠莊 權公 倡義碑) 왼편으로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觀察使 尹公 雄烈 善政碑), 오른편으로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觀察使 李公 根澔 善政碑)를 볼 수 있었다.

1910년 조선이 망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윤웅렬과 이근호의 비석이 왜국 침략에 맞서 싸운 권율 장군 비석과 한곳에 세워진 것이다.

지난 2015년 윤웅렬과 이근호의 비석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거·보존을 놓고 오랜 시간 논의되고 있다. 탄죄비 설치 등을 놓고 결론이 나지 않는 동안 울분을 이기지 못한 일부 광주시민은 망치로 비석을 훼손하기도 했다.

비석 뿐 아니라 광주 곳곳에서 친일 잔재를 만날 수 있다. 지난 9일 광주시가 발표한 ‘광주 친일잔재 조사 결과 및 활용방안 제시 용역’ 결과 비각·누정현판·각급학교 교가를 비롯한 군사·통치·산업시설 등에 친일 시설물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비해 3·1운동의 사적지는 관리·보존이 전무한 상황이다. 첫 거사가 일어났던 부동교 아래 광주천변에서 작은 장터의 흔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표지석이나 안내문 등도 찾아볼 수 없다. 시위대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에서도 3·1운동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광주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고서야 독립운동사적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부동교에는 기념공간 등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