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대 그노래 다시부르는 임을위한 행진곡] <8> 프랑스혁명과 ‘라 마르세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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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대 그노래 다시부르는 임을위한 행진곡] <8> 프랑스혁명과 ‘라 마르세예즈’
자유·평등·박애의 노래…프랑스 國歌 된 ‘라 마르세예즈’
2018년 10월 01일(월) 00:00
프랑스 파리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건립된 에펠탑에는 자유와 인권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민중들은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민중을 결합하는 강력한 촉매제다. 그러나 민중가요가 어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변혁기,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하는 시기,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 세력이 등장할 때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다. 일반 민초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은 노래 안에 공동체성, 역사성, 가치가 거대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콩코드광장 분수탑.






유럽의 역사에서 프랑스 파리 혁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편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노래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파리의 심장부, 에펠탑(320m).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세계 박람회를 위해 건립된 구조물이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구조물은 예술적 감각을 배면에 담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이 내재하고 있는 의미와 가치까지도 실답게 품는다.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진 탑은 민주와 인권을 향한 열망으로도 보인다. 세계 도처에서 온 다양한 시민들은 따가운 햇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인종과 문화, 국가 등 저마다 다른 배경을 지닌 저들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에 유학을 와 음악을 가르치고 한국인 가이드를 하고 있는 김선정 씨는 “파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공간을 넘어 수많은 유적의 보고”라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각기 개성적이면서도 조화롭게 융합돼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프랑스가 지닌 융합의 힘이며, 그 힘의 토대는 자유와 평등을 염원했던 혁명 정신에서 연유한다”고 덧붙였다.



정취가 넘치는 파리 세느강변.






18세기 프랑스는 모순이 집약된 사회였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시기였다. 알베르 마티에는 ‘프랑스 혁명사’에서 혁명의 궁극적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일으키게 하나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사회 전복은 언제나 계급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언급한대로 프랑스 사회는 당대의 모순이 점차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상업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물가는 폭등했지만 시민들의 삶은 피폐했다. 시민들과 노동자계층은 날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당시 프랑스는 제도적으로는 봉건사회였다. 성직자나 주교들은 제1신분으로 막대한 부와 특권을 누렸다. 제2신분은 봉건 귀족과 재력을 겸비한 새로운 귀족층이 여기에 해당했다. 마지막 제3신분은 농민과 평민, 도시상공업자들인 부르주아가 여기에 속했다. 부르주아들과 평민들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루이 16세가 통치를 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은 교회 고위직은 물론 통치기관을 장악하고 면세 특권까지 누리고자 꼼수를 부린다.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

“방안의 주요 골자는 귀족이 면세 특권이라는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누리면서 국가재정의 엄청난 적자를 해결하려는 어이없는 방안이었다. 인구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한 50만의 특권 신분이 국가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제3신분에게만 모든 세금을 매겨서 국가의 재정 적자를 해결하겠다고 했을 때, 상승일로에 있는 부르주아지와 특권 신분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책과함께, 2011)

물론 이러한 상황을 조정할 이는 국왕이었지만, 루이 16세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국왕은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그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왕비(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의 프랑스를 더더욱 불행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허영심이 많고 온갖 추문에 둘러싸여 있었다. 낭비벽이 심한 데다 경박하기까지 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당시 제3신분에 속해 있던 이들은 새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사체(국민의회)를 추진한다. 루이 16세는 이를 인정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친위부대를 동원해 맞선다.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성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바스티유는 학정과 봉건제도의 상징으로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3일간의 폭동으로 감옥 소장과 파리시장 등이 처형됐다. 성난 민중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봉건제 폐지 외에는 없었다. 이후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을 단행하고 자유와 평등 등 기본권을 주창했다.

프랑스 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구체제를 ‘앙시엥레짐’이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에 대하여’(1963)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이 강렬할 뿐만 아니라 자유에 대한 비젼과 결합된 경우만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단순한 교체가 아닌 실질적인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취가 넘치는 파리 세느강변.






당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광장에 들어선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의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혁명이 일어나자 유럽의 국왕들은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 왕가를 도우려 노심초사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모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은 프랑스 왕가의 친척국이기도 했다.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프랑스 왕가를 돕는 오르스피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당시 북프랑스에는 젊은 의용병들과 같이 전쟁을 준비하던 젊은 장교 ‘루제 드 릴’이라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북프랑스 시장인 디트리크로부터 의용병을 북돋울 수 있는 군가를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루제 드 릴은 급한 마음에 그날 저녁 날밤을 세워 노래 한 곡을 만든다. 일병 ‘라인군의 군가’는 그렇게 탄생한다.

예상과 달리 의용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라인군의 군가’를 힘차게 불렀고 이내 노래는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때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올라온 마르셰이유 지역 출신 의용군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파리 중심가를 행진한다.

거리에 나와 있던 파리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를 한다.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고 이내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된다. 프랑스 국가가 ‘마르세이유’라는 뜻의 ‘라 마르세예즈’로 불리게 된 연유는 그런 배경을 담고 있다.

/파리=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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