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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의 문화카페] 문화계 블랙리스트 ‘유감’
2016년 10월 19일(수) 00:00
지난 2012년 여름, 이종덕 충무아트홀 대표(현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흑백사진이 눈에 띄었다. 책상 뒤 벽면에 걸린 발 사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 그림이 걸려 있는 CEO 방은 많이 봤지만 사람의 발 사진을 ‘모셔둔’ 경우는 처음이어서 낯설었다. 더욱이 여기저기 피멍으로 얼룩져 있고 굳은살이 박여 있는 ‘못난이’ 발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최근 은퇴 공연을 가진 발레리나 강수진(49)씨. 지난 2009년 국제 무용제를 준비하면서 처음 강씨를 만났다는 이 대표는 혹독한 연습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무대 위의 우아한 자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목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순간 마음이 뭉클해진 이 대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며 찬사를 보냈고 강씨는 감사의 표시로 발 사진을 선물했다고 한다.

최근 SNS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 남자의 손’이라는 제목의 사진 한 장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얼마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31)의 ‘못생긴 손’이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무서울 정도로 연습벌레라는 것을. 손톱이 남아나지 않도록, 손가락 길이가 닳도록 그는 바쁜 스케줄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라는 글과 함께 지인이 페이스 북에 올린 사진은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렸다.

기자 역시 2년 전 광주 유스퀘어 문화관 금호 아트홀에서 연주하던 그의 무대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금호 아시아나 문화재단이 후원한 이날 음악회에서 그는 이제 막 데뷔 무대에 오르는 신진 예술가처럼 공연 내내 열정적인 자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개인적으론 빼어난 연주도 연주이지만 그의 진지한 모습에 더 감명을 받았었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예술적 성취는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대표가 강씨의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둔 것도, 정부와 민간 문화재단이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것도 이 같은 예술의 공공성 때문이다.

요즘 국내 문화예술계가 때아닌 ‘블랙리스트’ 공방으로 어수선하다. 현 정부가 일부 예술인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작성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기금 대상에서 (이들을) 제외하라는 공문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보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지원불가’ 대상 9473명 가운데에는 세월호 관련 선언이나 문재인·박원순 후보지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대거 포함됐다.

이에 대해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감에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이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참여정부 시절, 민예총 계열인사들이 국립현대미술관 등 주요 문화예술단체 수장을 ‘접수’ 했는가 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념과 코드가 맞는 예술인들이 ‘빛을 본’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진위야 어떻든 도전과 개성을 추구하는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데 정치가 개입해선 안 될 것이다.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세운 정부라면 더더욱 그렇다.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