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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서점上] 학생·노동자·농민 사랑방 … 독재 항쟁정신 싹 틔우다
1977년 김상윤씨 ‘의식화 학습’ 책 공급 위해
계림파출소 인근 헌책방 거리에 문 열어
5·18때 부부 모두 잡혀가 … 81년 문 닫아
올 광주비엔날레서 스페인 작가 예술작품 재현
2016년 08월 17일(수) 00:00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김상윤·정현애 부부는 “당시 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담양군 수북면 자택을 찾아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니 얼핏 서점 분위기도 난다.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광주, 시간 속을 걷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최소 30년 이상 된 공간일 것, 가게일 경우 주인이 바뀌지 않거나 가족이 이어받은 곳일 것. 그런 점에서 이번 회에 다루는 녹두서점은 원칙을 벗어난 공간이다. 1981년 문을 닫아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녹두서점이 35년 세월을 건너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2016 광주비엔날레(9월2일∼11월 6일) 기간 동안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Dora Garsia)는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자, 우리 모두를 위한’을 전시한다. 비엔날레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이다.

나부터도 책이나 자료를 통해서만 인지하는 공간이라 녹두서점의 역사가 궁금했다. 상편에서는 옛 녹두서점에 대해, 하편에서는 5·18과 녹두서점, 그리고 작가가 새롭게 해석한 녹두서점의 이야기를 전한다.



녹두서점 주인장 김상윤(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정현애(전 광주시 의원) 부부를 찾아 담양군 수북면으로 향했다. 책이 촘촘히 꽂힌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은 얼핏 서점처럼도 보였다. 정씨는 “녹두서점, 그리고 5월 광주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부부는 작가가 재해석한 ‘녹두서점’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도라 작가는 부부에게 “녹두서점의 재현은 책과 책상과 건축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역사와 정치, 기억, 예술, 그리고 권력 남용에 대한 저항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협조를 요청했었다.

녹두서점은 1977년 문을 열었다. 첫 장소는 계림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사이 헌책방 거리. 고(故)장두석 선생이 계림신용협동조합에서 100만원을 융자 받도록 도와줘 어렵사리 가게 문을 열었다.

김상윤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붙잡혀 1975년 2월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학습조’를 만들어 대학생들의 의식화 작업에 들어갔고, 정치외교학과 복학생 윤상원도 함께였다.

“5∼6명이 한 조가 돼 6개월 동안 학습하고 나면 그 여섯 사람이 또 여섯 사람을 의식화 시키는 방식으로 학습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책 공급책이었는데 서울의 유명 필자들에게 편지를 써 책을 받기도 하고, 서울 CBS 기자로 활동하던 친구 송정민(전 전남대 신방과 교수)이 한달에 3만원씩 보내주면 책을 사곤했습니다. 백낙청의 ‘민족문학 세계 문학’이 1900원 정도 했으니 꽤 여러권을 살 수 있었어요. 학습조가 확대 되면서 보안에 문제가 생겼고 차라리 서점을 만들자 싶었죠 ‘책방’이라는 공식적 공간을 통해 의식화 작업을 지원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한 겁니다.”(김상윤)

출발은 작은 헌책방이었다. 당시는 새책을 사는 게 만만치 않아서 중고생 참고서가 많이 팔렸다. 녹두서점도 헌책과 참고서 등을 팔아 유지했다. 자연스레 ‘위장’도 됐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뜻을 잇겠다는 마음을 담아 ‘녹두서점’이라 이름붙였다. 붉은 벨벳과 푸른 벨벳으로 만든 전봉준 액자는 서점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많이 팔려나갔다.

1978년 중학교 교사 정현애씨와 광주 YWCA에서 결혼하며 부부가 함께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서울에서 김지하 양심선언 유인물을 뿌리다 지명수배된 정씨의 친구 소개로 만나 연을 맺었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서점 일을 봤죠. 신혼이라 미래를 설계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럴 틈이 전혀 없었죠.(웃음) 끝도 없이 서점으로 찾아오는 사람들 밥해 먹이다, 아예 서점 옆 식당을 계약해 밥값, 막걸리 값을 냈죠. 생활비의 5배가 들었어요. 통금시간까지 토론이 이어졌고, 수배자를 연결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헌책방 거리에서 한 차례 더 이사를 한 후 장동으로 옮긴 건 1979년 겨울이었고 80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전남여교에서 장동로터리로 가는 길, 현재 자비신행회 건물인 서점 대신 현재는 오월항쟁 표지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서점과 부엌, 작은 방으로 구성된 15평 공간은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당장의 사회 변화보다는 길게 장래를 준비하자”는 마음으로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많은 책을 사서 공급했었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등 많은 책을 읽었죠. 당시에는 판금 서적이 되면 서점들이 책을 모두 출판사로 반납해야했어요. 하지만 그냥 반납하는 것보다는 파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에 시내 서점들이 책을 몰래 숨겨놓았다 제가 나타나면 주곤 했습니다. 자연스레 ‘녹두서점에 가면 책이 있다’는 말들이 돌았고 전남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죠.”

녹두서점은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와 함께 유신 말기 의식화 세례를 받은 이들의 핵심 공간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어용교수 백서’를 준비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됐다. 또 로케트 전지 노동자 투쟁,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 사건 기념 행사 등 노학연대의 장, 농민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녹두서점이 나름 ‘합법적 공간’인 셈이었죠. 그 전에는 가톨릭, 기독교 등 종교 울타리 안에서 사회 운동을 했다면 녹두서점은 그런 종교적 색채 없이 직접적으로 사회 운동을 하던 이들의 공간이었어요. 녹두서점은 또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상의하러 오는 곳이었습니다. 시국발언 한 교사들의 가족, 교육지표 사건, 노동, 교육, 농민운동 관련자들이 많이 찾았지요. 녹두서점이 거점이 돼 서로 만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정현애)

1978년 12월 정씨 등이 참여한 ‘송백회’가 출범했다.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구속된 이들의 부인들 친목모임으로 출발한 송백회는 5월 항쟁 기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5월 17일 밤 11시 30분, 김상윤은 권총을 들고 서점으로 들이닥친 4명에게 붙들려 끌려간다. 정씨 역시 27일 동이 틀 무렵, 광주YWCA에서 유인물 작업 등을 하다 5일만에 다시 돌아간 서점에서 붙잡힌다. 누군가가 서점에 숨겨둔 총을 근처 전봇대 밑으로 옮기고 막 학교 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남편에 이어 시동생, 시누이 등 온 가족이 검거된 후 잠시 시아버지가 서점을 운영했다. 수사관들에게 위협을 받아 더 이상 녹두서점이라는 이름은 쓰기 어려웠다. 한얼서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80년 8월까지 그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그해 9월 풀려난 정씨는 다시 서점으로 갔다.

“거의 빚으로 책을 들여다 놨는데 서가의 서적을 계엄사가 모두 불온서적이라고 가져가 버린 상황에 먹고 살 일이 갑갑했죠. 남편은 사형 받는다는 말이 나오고 정신이 없었어요. 서점 문을 계속 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구속자 가족들, 5·18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쉽사리 문을 닫을 수 없었죠.”

이후 1981년 가게를 내놓고 전남대 살레시오고 앞으로 옮겨간 후 후배가 이어받지만 1981년 5월 문을 닫으며 녹두서점의 역사는 끝난다.

녹두서점에 대한 사진 등 기록은 의외로 없었다. 당시는 누구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일기도 쓰지 않았다. 편지 등도 남겨두지 않았다. 정씨가 남편이 잡혀간 후 가장 먼저 없앤 것도 학생과 서점을 찾은 이들의 이름이 담긴 외상장부였다.

“많은 이들이 녹두서점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해요.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난 이들이 ‘저도 녹두서점에 갔었어요’ ‘외상값을 못 갚았네요’ 이야기하곤 하죠. 오월 항쟁 당시 수사관들이 당신, 어떻게 이 일에 뛰어들게 됐냐 물으면 대부분 녹두서점을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정현애)

남편이 끌려간 후 자신이 구속될 때까지, 17일∼27일 녹두서점을 지켰던 정씨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5·18은 우리에게 ‘느닷없이’ ‘갑자기’ 다가왔고 인생을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