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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룡 시인·문학들 발행인]말들의 숲에는 지극함이 있다
2016년 06월 27일(월) 00:00
책상 위에는 원고 뭉치가 수북하다. 시, 소설, 수기, 동화, 고문서 등등. 찬물로 세수하고 밤을 새워 들여다보아도 족히 몇 달은 걸리겠다. 왜 이렇게 검토가 늦느냐, 이런 대우를 받기는 처음이다, 하는 채근과 협박도 이어진다.

“모든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니체의 말대로라면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정신’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원고 검토야말로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가 아닌가. 하지만 종일 중과부적에 시달리고 나면 시쳇말로 혼이 나간다. 만신창이 몸으로 타인의 ‘피’와 ‘정신’을 맞이하는 것은 예의도 상도도 아니려니. 그러면서도 오늘은 꼭 이 글만은 봐야지! 하고 의자를 당겨 앉곤 한다.

어떤 말이든, 말들의 숲에는 지극함이 있다. 웃자란 보리밭은 까칠하고, 텅 빈 고목의 속살에는 푸른 이끼들이 무성한 법. 그 까칠함에 손을 베이고 푸른 이끼들에 눈을 닦는 나는 분명 행복해야 맞다. 그런데도 이튿날 아침 나는 전화를 하거나 메일로 답신을 보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난해 늦가을쯤으로 기억한다. 한 고등학교 국어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학생들 몇이서 장편소설을 썼는데 출판이 가능하냐는 물음이었다.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작가도 아니고 고등학생인 데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학생들의 공동창작품이라니, ‘아니겠다’ 싶은 맘이 앞섰다.

이쪽의 속내를 짐작했던지 상대방의 부연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소박한 문집으로 몇 권 만들면 되겠다 싶었으나 광주시교육청이 주관한 ‘책 쓰기 사업’의 우수 사례로 선정되어 출판과 함께 일반 서점에서 판매도 하면 어떠하겠냐”는 얘기였다. 망설이는 마음과 다르게 내 입은 덜컥 이렇게 내뱉고 만다. “예, 원고가 완성되면 한번 해 봅시다.”

물론 출판사에 투고된 글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이즈막 청소년들의 글쓰기가 화제여서 꺼낸 얘기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조부모와 부모의 삶을 인터뷰해 책으로 펴냈고, 충남에서는 ‘어르신 자서전 써 드리기’ 청소년 봉사단 발대식이 있었다. 인천시교육청은 ‘학생 책 쓰기 동아리 사업’으로 초·중·고 7개 팀을 선정해 집필과 출판과정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런 정책과 변화들이 얼마나 실속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래 전 야심차게 시작했다 헛물만 켠 청소년 문예지 ‘상띠르’ 생각도 났다. 이쯤에서 다시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털어놓자면, 장편소설 ‘이머전시’(Emergency)는 광주 석산고 학생들이 공동으로 쓴 아마추어 소설이다. 임신중독증으로 아내를 잃은 한 의사의 외아들이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 낸 성장소설이다. 입시에 쫓기는 학생들의 작품이니 구성이나 문체, 주제의식도 결코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짚이는 대목은 있었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방법을 모르는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어 주제를 잡고 서술하면서 맞춤법·문법·수사법 등을 깨우치고, 각 장면에 필요한 의학 지식을 찾아 7개월 동안 모험을 한 구슬땀이 그것이다.

지역 출판의 어려움을 말하자면 출판의 중앙 집중, 도서 유통의 난관, 독서 인구의 감소, 지역 서점의 도산, 독서운동의 확산, 관련 제도의 개선 등 이미 확연해진 문제들을 피해 가기 어렵다. 거개가 이미 상식화된 얘기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글이다. 앞서 열거한 출판의 여러 문제들보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가장 원초적인 매개가 바로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고 싶어 흉내 내거나 이력에 저서 한 권 더 얹고 싶은 듯한 글을 탓할 생각은 없다. 우리 모두는 길 위에 있으니. 대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글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한물가서 허름한 간판 위에 거미줄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거리에도, 독자와 작가와 출판사의 타는 목을 적셔 줄 홍일점의 주막 한 집은 있으리라 믿기에. 그래야 어떤 말이든, 말들의 숲에는 지극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 지역의 출판사와 잡지사 등이 지역 출판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국 지역출판잡지인 연대’를 결성했다. 올해만도 광주, 부산, 제주, 대전, 수원, 강원, 대구 등지의 출판인들이 순천과 대전에서 모임을 가졌고, 가을에는 제주에서 회합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제주에서 처음으로 ‘지역 도서전’도 열 계획이다.

또 하나는 부산문화재단의 선구적인 사례다. ‘지역 출판문화 및 작은도서관 지원 사업’으로 지난 2012년부터 지역 소재 출판사의 우수도서를 선정하고 구매하여 지역 내 도서관에 배포하는 사업이다. 여기에 부산시는 2009년부터 관내 공공도서관에 지역 출판물을 구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말들의 숲에 지극함이 넘치고 그 향기를 나눌 수 있는 지혜를 모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