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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진환 화백을 아시나요
2015년 10월 07일(수) 00:00
“기어코 고대하던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감격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경성의 화가들도 ‘내 나라 새 역사에 조약돌이 되자’는 고귀한 표언 아래 단결돼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의 ‘20세기 근대미술의 거장 이쾌대…’전’(7월22일∼11월1일·이쾌대전)을 찾은 기자는 전시장 한켠에 진열된 누렇게 바랜 편지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이쾌대(1913∼1965) 화백이 절친이자 선배인 화가 진환(陳紈·1913∼1951)에게 보낸 편지였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감격과 민족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한 당시의 상황이 생생해 순간 뭉클했다. 광복 70주년과 타계 5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전시는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금기시됐던 이 화백의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대구의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桂山藝家)에서 영상물로 접했던 이 화백의 대표작들을 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경북 칠곡출신인 이 화백은 젊은 시절 대구에서 잠시 활동한 인연으로 대구 문화예술인들의 집에 ‘입성’하게 됐다.

하지만, 이쾌대전에서 얻은 가장 큰 감동은 이름도 생소한 진환 화백과의 만남이었다. 고창 출신인 그는 이쾌대가 남긴 수십 여 편의 편지와 사진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이 화백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친 화우(畵友)이자 멘토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난 두 사람은 김종찬, 이중섭 등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미술가 협회’를 결성, 서양화에 전통 회화의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민족화가였다. 특히 진 화백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소(牛)에 비유해 수십 여 점의 유화와 스케치를 남겼다. 미술관에서 만난 대표작 ‘천도와 아이들’(1940년대 추정)과 ‘우기 8’(牛記·1943년)은 소재와 화풍이 이중섭(1916∼1956) 화백과 유사해 당시 각별한 관계였음을 추론케 한다.

특히 그에게 광주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부친의 반대로 서울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상과(商科)인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를 한 후 큰 매형(강봉구)이 살고 있는 광주로 ‘피신’왔다. 하지만 쫓기듯 떠난 ‘광주행’은 그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 됐다. 광주의 풍성한 예술적 기운은 큰 자극이 됐고 매형으로부터 소개받은 지역화가들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얼마후 고창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홍익대 초대 교수로 재직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못다 핀 화업은 현재 차남 서양화가 진경우씨가 광주에서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38세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진환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지만 이쾌대와 진환의 위상이 너무나 다른 것이다. “진환은 망각속에 묻혀 재평가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30∼40년대의 작가”(평론가 윤범모)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그래서 말인데, 진환 화백의 ‘분신’들을 볼 수 있는 이쾌대 순회전을 광주에서 유치하면 어떨까.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