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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윤 소설가·광주여대 교수] 한 나라의 언어, 그 원형적 무의식에는
2015년 10월 05일(월) 00:00
한글날이 다가온다. 나처럼 언어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언어는 수단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이 된다. 화가에게 색이, 음악가에겐 소리가 그렇듯이, 문예창작가들에게는 우리말의 결과 뜻이 우리의 즐거움이 된다.

어느 날, ‘간절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꼈던, 떫은 생감을 베어 먹은 듯한 불쾌감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환절기’이고, 내겐 오태석의 희곡까지 겹쳐 첼로 소나타의 둔중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기억된다. 물론, 환절기 역시 순 한글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써온 무난한 문법체계를 갖춘 단어이다. 절기가 바뀌는 시절. 그런데 ‘간절기’는 도대체 어디서 불거진 말인가? 절기 사이? 기준이 된 절기들은 뭔데? 아무튼 환절기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의 ‘벡터’적 의미이다.

언어 차용이란 몹시 사려 깊은 철학이 있어야 한다. 언어에는 그 언어 사용자들의 어휘적 리듬과 의미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글·우리말에는 우리 민족의 깊은 원형적 문화 인자가 담겨져 있는 법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수-족이 9월을 풀들이 마르는 달이며, 10월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달이라고 지칭한 것에는 그들의 원형적 무의식 속에 잠재된 그 씨족들 나름의 무의식적 문화 에너지가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계절 감각의 집단적 환원일 것이다.

찾아보면, 환절기 아니어도 더 좋게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는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황혼을 뜻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해가 져서 개인지 늑대인지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키는 매우 쉽고, 훨씬 더 시적이기까지 한 용례도 있다. 우리는 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한다. 언어적 유포니(euphony=활음조)도 좋고 의미도 명료한 ‘어스름’ 또는 ‘해거름 참’이라는 낱말들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은 배열만 달리해도 딴 뜻을 갖게 되고, 뜻의 배열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효과를 갖는다고 했다. 어스름과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칭하는 시각은 같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각각 다르고, 그럼으로써 각각 언어 사용권자들의 무의식 역시 달라지는 것이다.

간절기라니. 아무리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이처럼 마구잡이로 툭툭 던지며, 마치 그것이 가장 적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일이며, 심지어 가소롭기도 하는 일이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라면 - 떫은 감 베어 문 느낌에서 끝이었다면- 좋다. 그런데 그것이 ‘깜놀’, ‘개무섭다’, ‘병크’에 이르면 가히 우려할 지경이다. ‘냉무’란 단어를 몰라서 한참을 헤맸던 수년 전의 기억까지 더하여지면, 우리 언어의 병적인 활용은 조금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 깜놀은 눈치 빠른 사람들에겐, 깜짝 놀란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 가능하고, 개무섭다의 ‘개’는 무서움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접두어라 유추할 수 있다. 세상에 병크라니? 그것의 의미가 ‘병신+criticize’에 이르면 그야말로 ‘깜놀’하고, ‘개 열받아’ 병적 행동을 할 지경이다. 필자가 과문하여, 이 정도밖에 모르지만 더 많은 우리글의 황폐화가 가속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언어는 정신의 호흡’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 정신을 생존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한 민족의 언어는 그 언중들의 민족정신의 생명의 호흡인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탱할 수가 없다. 우리 언어 속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산이 담겨져 있다. 이를 바로 지키고 발전적으로 계승 시키는 것이 우리의 소명일 것이다. 부디, 돌아오는 한글날에 우리의 호흡을 제대로 해보자, 폐부 깊게!